오후 2시가 되기 전 까지는 솔직히 말해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충 듣고 대충 말하고 멍하고 찌뿌둥한 몸 상태 때문에 전형적인 'E' 타입 인간인 내가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오후가 되어야 얼굴에 생기가 돌아 '아이고 현화 씨는 퇴근시간이 다 되면 얼굴이 갑자기 확 펴고 예뻐지네요.'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퇴사하면서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침에 늦잠을 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왜 난 6년째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2016년 7월에 퇴사를 하고 8월에 바로 베니스에 와서 남의 집 스텝일을 할 때부터 아침밥을 시작했으니 내가 늦잠을 잘 수 있었던 기간은 한 달이 채 안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없었던 몇 날들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을 했다.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손님이 있던 날도 한 10번 정도는 빼먹기는 했다. 아팠거나, 전날 손님들 다 같이 과음을 했거나, 손님이 한 명이라 도저히 의욕이 안 생겼다거나 다양한 이유로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5년 동안 10번 안 한 거면 지각대장에 불량 사원이었던 회사생활에 비하면 대기록이다!
그만큼 나는 아침밥에 내 열정, 체력, 영혼을 모두 갈아 넣었다. 갈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땅까지 여행 와서 현지 음식만을 먹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이유는 한식이 먹고 싶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피자, 파스타, 스테이크 물론 엄청나게 맛있지만 티본스테이크 1kg을 배 터지게 먹고 와서도 컵라면 하나 끓여먹어야 입가심이 되는 게 바로 진정한 한국사람 아닌가.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이 나라까지 와서 먹어보고 느껴봐야 할 것들이 천지일 텐데 왜 아침밥을 두 그릇씩이나 먹어 하루 끼니 용량의 반 이상을 채우고 한국 라면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묻는 거지?
물론 때로 한국의 매운 맛이나 국물요리가 당기는 마음은 긴 여행을 몇 번 다녀본 나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4-5박을 하면서도 밖에 거의 나가질 않고 내 옆에 꼭 붙어서 내가 먹는 끼니를 따라 한식만을 고집한다거나, 삼시 세 끼를 컵라면으로 때우는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다 보니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섰다. 이럴 거면 도대체 여기까지 왜 오신 겁니까? 이게 아주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내가 해준 밥을 최고라고 이야기해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꽤 기쁘고 뿌듯하기도 했고 아침밥의 맛이나 퀄리티가 한인 게스트하우스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늘 신경 써서 요리를 하고 최선을 다했다. 점차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피렌체 맛집'으로 스스로 SNS에 태그를 거는 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조식이 맛있다는 후기들이 쌓여갔다. 특히 나는 '국장인'으로 유명했는데 칼칼하고 얼큰한 국물이 내 전문이었다. 오죽하면 '아니, 왜 이 집은 미역국도 얼큰한 해장국 맛이 나는 거죠?'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2호점의 아침뷔페(+국은 따로)
그러던 중 한 여학생이 손님으로 왔다. 그녀는 영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금발로 탈색한 머리에 흰 피부가 아주 잘 어울리는 예쁜 친구였다. 붙임성이 좋기도 하고 같은 아이돌 멤버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이 친구가 귀엽고 좋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손님들과 금방 친해지기 때문에 별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5박을 하는 내내 그녀는 내가 앞서 언급했던 손님들처럼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젤라토를 사 먹고 온다며 산책 겸 나갔다 오는 것 말고는 집에 붙어 있으면서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아침밥 시간이나 내가 밥을 먹는 시간에는 꼭 주방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음식은 정말 새 모이만큼 먹으면서도 맛있어서 꼭 챙겨 먹어야 한다며 주방에 한참을 앉아서 수다를 떠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떠나질 않는다? 처음 5박인가를 예약하고 왔던 그녀는 첫 체크아웃 하던 날에 비행기를 놓쳤다며 5박 더 연장을 요청했다. 그렇게 한번, 두 번 연장을 하더니 결국 21박을 하고서야 영국으로 돌아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레 새로운 손님을 체크인하고 있을 때 그 친구가 내 곁에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녀는 피렌체가 좋아서 숙박을 계속 연장한 걸까, 아침잠이 유난히 많았던 그녀가 아침밥이 정말 맛있어서 한 번도 그 시간을 빼놓지 않고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나왔던 걸까.
그녀를 보면서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물론 정말 한식 자체가 그립고 먹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정말 그리웠던 건 이 먼 타국에 와서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한국말, 한국 음식, 한국 사람으로 느낄 수 있는 고향의 따뜻한 '정'이 아니었을까.
하루든 이틀이든 밥을 같이 먹으며 그날의 계획이나 본인들의 여행담을 나눌 수 있는 이 사람들은 과히 '식구' 라 할 수 있겠다. 밥이야 돌이 들어가든 짜든 쓰든 달든 그들의 입에 맛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모국어로 실컷 떠들 수 있고 뜨거운 국물을 '크아아 시원하다'라고 말하며 들이키는 게 자연스러운 그 식탁에 둘러앉아 보내는 그 30분 남짓한 시간 자체가 그들에게는 밥보다 보약이었으리라.
21박이나 했던 그 여학생도 결국 영국에서의 고단한 생활을 '아침밥'으로 대표되는 같은 나라 사람들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좋아서 이곳에 남았던 것이다. 아, 물론 젤라토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부터는 아침밥에 정말 진심을 다하게 되었다.
피렌체에 사는 친구들과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시고 과음을 하거나 친구 집에서 잔 날도 어김없이 새벽 6시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아침밥을 했다.(음주 자전거로 인해 아르노강에 빠질 뻔 한 사건 이후로는 걸어 다닌다.) 숙박객이 많은 성수기에는 아침밥에 지장이 갈까 봐 민박주들끼리는 두 달이 넘도록 술 약속을 하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을 정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민박집들도 얼마나 아침밥에 정성을 다하는지 알 수 있다.
설날에는 떡국, 갈비찜 추석에는 잡채와 각종 전을 준비하는 것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엄마는 시집도 안 간 딸이 명절마다 15인분씩 명절 음식을 하느라 개고생을 하는 게 안타깝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시집을 가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셨지만 두 배 세 배로 감동했다며 좋아해 주시는 손님들을 보면 고단함도 금세 사라졌다.
전, 삼계탕, 잡채, 냉면, 수육, 짬뽕, 문어, 갈비찜 등등등 없는 거 빼고 다 나오는 메뉴들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건 좋았지만 요리 자체가 그리 즐겁진 않았던 나는 하루에 한 번만 주방일을 한다 라는 철칙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식에서 그치지 않고 저녁에 소소한 술자리들이 벌어지면 안주삼아 이것저것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애주가인 나는 안주에는 더 진심이었고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홍합탕, 닭발, 순대볶음, 껍데기, 감자탕 등 전형적인 야식 겸 술안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2호점까지 오픈하고 난 뒤에는 아예 '포차 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사람이 궁하면 우물을 판다고 라면 하나 겨우 끓일 줄 알던 내가 '활어회' 말고는 이제 못 만들 메뉴가 없었다. '한국'을 생각하면 그리워할 대표음식들이 뭘까 궁리하며 만들어 직원들과 테스트 겸 먹어보고 맛있으면 손님들도 해주고 판매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뱅쇼'나 '상그리아' 등 술을 직접 만들어서 주기도 했다.
탕수육, 김밥, 고추잡채, 닭발, 등뼈찜 등 안주안주
'아침밥'을 넘어서 술까지 곁들인 한국 음식의 파급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술자리들을 통해 친해진 친구들은 아직도 끈끈한 관계들을 유지하고 있다. 32살 전에 한국에서 만들었던 인연들도 소중하지만 이곳에 와서 손님으로 만나 친구가 된 많은 인연들은 지금 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정말 소중한 존재들이다. 손님들만 힐링이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나도 그들과 함께 먹는 밥을 통해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고 위로받고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로 손님들이 적어진 요즘도 나는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아침밥을 짓는다. 특히 요즘은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친구들이 자주 오는데 이들은 기숙사 생활로 인해 한식을 오랫동안 먹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밥을 정말 맛있게 잘 먹는다. 엄마 밥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 정말 맛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두 명의 밥상도 더 신경 써서 준비하게 된다. 제일 그리웠을 음식이 뭐였으려나..라고 고민도 하고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민박주들 사이에서 이제는 아침밥을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고민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코로나로 인해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위생상의 문제로 꺼려하는 일이 된 게 아니냐는 의견이다. 물론 나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지치기도 했는데 정말 좋은 핑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나는 '아침밥'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몸이 좀 고되고 힘들어도 위생이 문제면 개별로 차려주면 되는 문제 아닌가. 누가 보면 대단한 희생정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외할머니가 말씀하셨거든.
"세상에 복 짓는 일 중에 가장 큰 복을 짓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는 일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