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언어학자, 라디오 작가, 뮤지컬 배우, 호텔리어, 공연기획가, 작가, 탐험가 등 어떤 직업만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목표로 잡아 노력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후에는 '유럽여행을 하고 싶어' '아프리카에 가 볼 거야' '고양이 집사가 되어야지' '잘생긴 남자랑 찐한 연애를 하고 싶어'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지' 같은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되는 버킷리스트들이 내 삶을 가득 채웠다. 가끔 현실의 제약들이 발목을 잡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보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2016년 7월..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6여 년 간의 회사생활을 접었다.
이유야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삶에서의 '나'의 부재..
어느 순간 '내'가 사라져 있었다.
아주 사소한 결정을 할 때도 '회사' '남' '친구' '가족'을 우선 고려하게 돼버리고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
긴 삶 속에서 그래도 오롯이 '나'를 생각하며 살 수 있는 기간이 5년쯤은 돼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한국을 떠났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국에 남아 있으면 그냥 조금 쉬다가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뻔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만두기 위한 어떤 강력한 핑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외국행 티켓이 필요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젊을 때 외국에서 10년 이상 살아보기’가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기 때문에 주저할 것이 없었고 단지 어디로 가느냐가 고민될 뿐이었다.
한참 퇴사 결재가 쭉쭉 올라가고 있을 때 '이제 뭐해 먹고살지 어디 가서 살지' 하는 생각에 네이버 JOB& 페이지를 즐겨 보기 시작했다.
그곳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도전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그중 우연히 눈에 들어온 기사가 하나 있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시작해서 유럽에 10개의 민박 체인을 만든 청년들의 이야기였다.
나이도 나랑 비슷해 보이고 평소 게스트 하우스 운영에 관심도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이력 중에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이라는 게 적혀있었다.
순간 ‘아, 우리 팀 막내도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 이랬는데 혹시 둘이 서로 알려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막내 자리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근범 씨, 혹시 이 사람 알아요? “
“엇, 네네. 저희 선배님이세요. 별로 친하진 않지만 연락처는 알고 있어요.”
“오, 그럼 저 물어보고 연락처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궁금한 것들이 좀 있어서요.”
“네, 그럼 확인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유럽에서 민박집을 하는 청년들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바로 카톡을 하나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직장인 장현화라고 합니다. 네이버에서 기사를 읽고 제가 생각하는 인생을 살고 계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대화도 나눠보고 싶고 유럽에 가서 함께 하고 계신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연락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바로 답장이 왔고 같이 할 뜻이 있다면 간단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하루 정도 고민해서 적은 자기소개서에 탈출을 원하는 절절한 심경을 담았고 유럽에 올 수 있다면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이탈리아 베니스 지점으로 가라는 통보에 따라 이탈리아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유럽 호텔에 취업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대학교 전공이 호텔경영학과였기 때문에 별 의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 속아주셨는지도...
한인 민박집이 어떤 환경인지는 몰라도 당장 내 돈이나 퇴직금을 쓰지 않고 외국에 머물 수 있다는 조건 자체가 매력적이었고 한국을 떠날 수 있다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내 나이 32살에 그렇게 툭 가볍게 한국을 떠났다.
와우! 베니스에서 살게 되다니!!!
글썽이는 엄마 아빠의 눈물을 뒤로하고 비행기를 타면서 다짐했다.
‘엄마, 아빠 엄청 성공은 못해도 엄청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게 살게요!’
새벽 4시에 도착한 베니스에서 스텝 세 명과 같이 지내야 한다는 방에 들어서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남자 한 명과 여자 세 명이 조그만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혼숙은 그렇다 치고 커다란 퀸사이즈 침대 하나와 바닥에 매트리스만 두 개만이 덜렁 놓여있었다. 바닥은 이미 각자의 짐들로 발 디딜 공간도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사장과 연락할 때 맡기로 한 일은 성장기에 있던 체인사업의 전반적인 운영방안 기획과 조직화 및 매뉴얼 작성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숙식제공을 받기 때문에 청소 정도는 돕게 되겠구나 했는데 도착한 다음날 아침밥 준비부터 투입되었다.
“언니 이 감자 좀 깎아주세요!”
그리고 고된 가사노동, 노동, 노동의 나날들.
분명히 내가 생각한 일과도 달랐고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앞에서만 일하던 내게는 낯설고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왜 이렇게 신나고 재미있는 거지?
아침밥을 차리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고 변기를 닦고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내일 또 뭐 먹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고민이 되는 삶.
단순하지만 즐거웠다!
사람들과의 반복되는 새로운 만남과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나에 대해 질문해 주는 여행객들의 호기심 속에서 조금은 잊고 지내던 '나'를 되찾는 기분이었다.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
여행을 통해 삶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싶어 하는 그들을 돕는 내 모습에서.. 회사에선 느낄 수 없었던 보람..이라는 감정도 아주 오랜만에 느껴졌다.
베니스에서 2개월을 보낸 후 바르셀로나 지점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지점을 혼자 운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직접 예약 관리, 홍보, 마케팅, 운영 전반에 대해 책임지고 해 보니 좀 더 자신감이 생겼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만의 게스트 하우스를 시작하자!라는 결심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마치 이것을 하기 위해 퇴사를 한 것처럼, 혹은 누군가가 미리 계획을 정해두었던 것 마냥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4개월 만에 '탁하우스'를 준비하고 오픈하게 되었다.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기에는 보통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직접 발품을 팔아 숙박업을 할 수 있는 집을 찾아 집주인과 합의를 한 후 렌트 계약을 맺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운영하고 있는 민박집을 권리금을 주고 인수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비용이 조금 덜 들고 내 스타일대로 집을 꾸밀 수 있는 대신 가능한 집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고 조금 쉽고 빠른 방법을 택하기로 한 뒤 눈 여겨보던 민박집 하나를 인수하였다.
비자를 받고 허가를 받는 부분에 있어 전 주인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숙박업 허가를 받는 부분에 있어서는 큰돈을 지불하고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손해를 보았지만 전반적으로는 물 흐르듯 원활히 일들이 진행되었다. (그 어렵다는 이탈리아 학생비자가 2주 만에 발급된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별명이 '장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름보다 자연스러운 별명을 따 '탁하우스'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집이니까 내 이름 붙여야지!라는 너무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는데 이후 왜 탁하우스냐는 질문을 1,000번도 넘게 들었다. 내 별명이 탁이라서 탁하우스예요,라고 하면 그럼 왜 별명이 '장탁' 이예요? 로 이어지는데 1,000번을 넘게 대답한 나는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
"옛날 옛날 유난히 발목이 얇은 소녀가 살았습니다. 발목이 너무 얇아 종아리와 같이 보면 다리 모양이 꼭 닭다리 같아 보였죠. 아이들은 그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장탉 다리, 장탉 다리'라고 소녀를 짓궂게 놀려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 소녀는 웬만해서는 기죽지 않는 소녀였습니다. 친구들의 놀림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당시 유행하던 '다모임'이라는 커뮤니티 사이트 아이디를 '거만한 닭다리'라고 정하기까지 했죠.
그렇게 '장탉 다리' '거만한 닭다리'로 불리기 시작했던 소녀는 친구들이 네 글자는 길다며 다리를 탈락시키고 '장탁' 으로 변형시킨 별명을 이름보다 더 많이 애용하며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끝-"
이야기가 잠깐 딴 길로 새었다.
다시 돌아가서...
민박집을 시작하고 나서 다음으로 많이 받은 질문은 ‘ 어떻게 이탈리아에 오게 되셨어요?'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퇴사와 이탈리아행은 거의 즉흥 연주곡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에서 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도 없다. 피렌체가 특별히 애틋했다기보다는 여자 혼자 민박을 운영하기에는 이 도시가 가장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직도 저 질문에 늘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단지 하나만은 확실히 대답하고는 한다. 이곳에 오고 나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원래 여행을 좋아하던 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아,, 나도 게스트하우스 사장하고 싶다!'
그 말을 또 한 번 현실로 만들고자 일을 저질렀다는 것 밖에 이 모든 일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것이 '탁하우스'의 시작!!!! (2016.11)
거창한 이유도 포부도 아니지만 '나'를 위해 그리고 나와 만나게 될 수많은 '그들'을 위해 탁하우스는 6년째 오늘도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