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손님 15명과 새해 첫날 동사할 뻔했습니다.

유럽에서 처음 한 새해맞이

by 피렌체장탁

너무 들떴던 걸까.


유럽에서의 첫 새해맞이는 정말 특별하게 하고 싶었다.

게다가 손님들과 함께 하는 새해맞이라니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였다.

주변 민박집 사장님들께 물어보니 다들 소소하게 집에서 와인파티를 하며 카운트다운을 할 거라고 했다.(그때 이유를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다.)


'아니, 난 뭔가 좀 스페셜하게 할 거야!!! 탁하우스가 평범할 순 없지!'


이런 무지하고 자만심 넘치는 생각으로 나는 새해맞이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때마침 대학교 때 같이 공연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해졌던 지은언니가 놀러 와 있던 시기라서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손님들과 밖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우리 둘은 클럽에 가서 밤을 새우는 건 어떨까? 길에도 밤새 사람들이 많을 것 같으니 이탈리아 사람들과 뜨거운 밤을 보내보자! 아.. 난 참 그때 열정적이고도 철이 없었구나.


12월 31일을 같이 맞이 할 예약 투숙객은 대략 15명 정도였다. 젊은 학생들도 있었고 커플, 그리고 모녀팀 등 다양한 구성이어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파티를 준비하기로 했다. 일단 저녁에 삼겹살과 각종 한식을 안주로 삼아 간단하게 반주를 한 후 희망자에 한하여 11시쯤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가서 불꽃놀이와 새해 카운트다운을 보기로 했다. 오전에 미리 카톡을 통해 공지를 했더니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나도 유럽에서의 새해맞이가 처음이었지만 여행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설레고 궁금하지만 혼자 밖에 나가 둘러보기에는 조금 겁이 났었는데 내가 함께 한다고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조차도 이탈리아에 자리 잡은 지 채 6개월이 안 되는 생초보였는데 말이다.


저녁의 술자리는 너무나 유쾌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사람들은 따뜻했다. 다들 이 시기에 여행 온 각자의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점점 친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힘드실까 걱정된다고 같이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던 모녀팀도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같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로서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새해맞이 탁하우스 원정대'가 결성된 것이었다.




"밖에 오래 있으면 추울지도 모르니 모두들 따뜻하게 입고 준비하세요^^ 소매치기도 많을 것 같으니 웬만하면 현금이나 가방은 챙기지 마시고요!"


그렇게 당차게 그리고 신나게 밤 10시 30분 즈음 우리는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은 기차역 바로 앞에 위치한 터라 집에서 미켈란젤로 언덕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일명 피렌체 두오모)와 회전목마가 있는 '레퍼블리카 광장', 그리고 우피치 미술관이 있는 '시뇨리아 광장' 등 주요 관광명소를 거쳐갈 수 있었다. 각 광장에서도 카운트다운 행사를 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구경하며 걷기로 했다.


그러나 그 들뜸과 설렘은 집에서 나오는 순간 살짝 후회로 바뀌고 있었다.


첫 번째 실수,

15명의 인원을 아무 준비 없이 통솔하려고 한 것! 다 같이 붙어서 이동하려면 인솔자의 표식 같은 게 있었어야 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내가 앞서 걷고 맨 뒤에서 지은언니가 사람들을 챙겼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뒤에서 따르는 일행들이 나를 잘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사진을 찍으려고 가져온 셀카봉에 손수건 같은 것을 묶어서 사람들에게 따르게 했다. 사소하지만 치명적이었던 것은 내가 애초에 그런 디테일 한 부분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장갑 따위는 없었고 손이 미친 듯이 시려웠지만 혹시 사람들이 놓칠세라 한시도 셀카봉을 내려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가며 들었지만 그날 나의 손은 동상 직전까지 갔던 것 같다.


두 번째 실수,

나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멈췄어야 했다.

집에서 시뇨리아 광장까지의 거리는 1km 남짓 된다. 평소 걸어서 20-30분 거리인데 수많은 인파에 밀려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익숙하지만 그때는 전혀 몰랐던 풍습인데 이곳에서는 개개인들이 콩알탄이나 폭죽 등 을 가지고 나와 길거리에서 터트린다. 심지어 병이나 유리를 던져서 깨기도 하는데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날 큰 소리를 내고 유리를 깨는 것이 악운과 귀신을 물리치는 의미라고 한다. 심지어 유리병에 폭죽을 꽂아서 터뜨리기도 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큰 지 전쟁 난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험악하면서 소란스러운 환경을 뚫고 힘겹게 시뇨리아 광장에 도달했던 것이다.

힘들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들떠있었다고 해야 하나. 또 도착한 그곳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역시 유럽이로구나! 여기도 이런데 미켈란젤로 광장은 얼마나 화려할까 싶어서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


연기와 인파속에서도 표정만은 정말 밝구나!!!!


강을 건너서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르는 계단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되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우리의 앞에도 뒤에도 사람들로 꽉 막혀있었고 뒤에서 밀려오는 인파로 인해 우리가 역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좁은 계단은 정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타고 올라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돌아갈 수도 계속 갈 수도 없이 계단 위에 사람들에 끼어 멍하니 서있었고 점점 1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다 카운트다운도 못 보고 개고생만 하게 생겨 구나 싶었다. 나도 나이지만 뒤에 따라오는 손님들이 심각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애써 웃으며 '재밌네요! 새롭네요!'라고 하셨지만 어느새 지친 표정을 어찌 알아채지 못할까. 특히나 어머님이 걱정되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손을 꼭 잡고 한 계단 한계단 올라갈 수밖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12시가 되기 10분쯤 전에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가던 길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 언덕 위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수들이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태리 친구들한테 물어본 바로는 '국민가수'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가수도 노래도 알 리가 없었으니 큰 감흥이 없었다.


미켈란젤로 광장의 인파와 새해 축하무대



"지금부터 30분 간 각자 구경도 하시고 사진도 찍으시고 새해 소원도 비신 후에 이 bar 앞에서 다시 만나요!"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싶었지만 연인이나 가족들이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각자 새해맞이를 한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도 지은 언니와 같이 사진도 찍고 사람 구경도 하며 2017년을 기다렸다.


"5(친퀘)! 4(꽈트로)! 3(트레)! 2(두에)! 1(우노)!!!! BUON ANNO."



2017년 새해가 밝았다. 아니 근데 불꽃놀이는 어디서 하는 거지? 분명 소리는 들리는 데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다. 우리가 생각했던 불꽃놀이는 여의도 불꽃축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피렌체 시내 전경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불꽃놀이였지만 이곳의 불꽃놀이는 소리만 요란하고 전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김 빠지는 순간! 그러나 특별하고 새로운 경험을 한 것에 만족하며 사람들을 기다렸다. 다들 각자의 시간을 보낸 후 다 같이 사진 한 장을 찍고 집으로 향했다.


흔들리지 않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걸 보니 그날의 카오스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 좀 힘들었지만 현지식 새해맞이 잘했고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당시만 해도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 하나뿐이었다. 12시가 지났지만 아직 올라오려는 인파와 이제 내려가려는 인파가 뒤섞여 아까보다 좀 더 확실한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한 계단 내려가는데 거의 10분이 소요되는 정도였다. 올라갈 때는 기대감이라도 있었지만 돌아가는 길을 피로감과 또 떨어진 체온으로 인한 추위 이 두 가지뿐이었다.

그나마 여긴 외국이고 우린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생존 의지만이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계단만 무사히 내려가면 시내는 괜찮을 거라고 애써 일행들을 다독이며 길을 걸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웬 한국인 커플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사연을 들어보니 미켈란젤로 언덕에 차를 대고 시내 관광을 하고 나서 겨우 올라와보니 차는 견인되어 있었고 차에서 숙박을 하려고 숙소 예약을 안 했던 터라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안타까운 사연이었지만 우리 집은 이미 만실이었고 내가 아는 한 민박집이나 다른 숙박업소도 연말 특수로 모두 만실인 상태였다. 그래도 좀 알아봐 주려고 몇 군데 민박집 사장님들에게 전화를 돌렸으나 대부분 방이 없거나 시간이 늦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혼자 있는 상태였으면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지만 이미 내 뒤에는 꽁꽁 얼고 지쳐있는 우리 집 손님 15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미 미안함과 책임감으로 무거웠던 어깨였던 지라 간판이 켜진 호텔들에 워크인으로 가서 문의해보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을 해주고 집으로 향하는데 그분들이 말없이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그럼 우리 집 건물에도 호텔이 몇 개 있으니 그곳을 알아보시고 잠시 거실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하시는 건 괜찮을 것 같아요!"

이것이 나의 세 번째 실수.


좀 매정하더라도 책임질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어야 했다.

남극에 조난된 재난 영화 같은 상황을 뚫고 어째 어째 집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

언덕에서 집까지 오는데 무려 3시간이나 소요된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눌 힘도 없이 손님들은 방으로 각자 들어갔다. 그 한국인 커플도 너무 추워하는 것 같아서 일단 집 주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사실 내 방이라도 있으면 방을 내어줄 수 있었지만 그날 지은언니와 나는 클럽에 가서 밤을 새리라는 야심 찬 계획을 하고 있었어서 내가 지내는 방까지 예약을 받아 손님들로 가득 찼던 상황이었다.


당장 우리도 이 새벽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두 명의 군식구라니...


그리고 그들의 태도가 나를 화나게 했다. 너무 당연한 듯이 주방에 들어와서는 다른 손님들이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방을 구한답시고 둘이 떠들거나 심지어 다투기까지 했다. 이건 우리 손님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라 이때부터 내가 실수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잠시 추위를 녹이고 와이파이만 사용한다고 하더니 여자분은 주방 테이블에 엎드려 아예 자리를 잡았다. 호텔도 좀 적극적으로 알아봐도 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인데 호텔 앱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 시간 뒤 아침이면 밥도 해야 되고 그분들만 두고 지은언니와 나도 나갈 수가 없기에 어서 호텔을 구해서 가시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건만 들은 척 만 척하는 그들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오히려 마음 약한 나의 성격을 정확히 간파했는지 지금 나가게 하는 건 너무 한 거라며 당당히 주방에 있기를 요구했다.


'하아.. 끝까지 쉬운 일 하나 없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결국 내가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집 건물에 있는 호텔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호텔들을 돌아다니며 빈 방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다섯 번째 방문한 멀지 않은 한 호텔에서 빈 방을 찾을 수 있었고 너무 지쳤던 나는 그들의 방뿐만 아니라 나와 언니가 쉴 방도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끝까지 보조배터리 빌릴 수 있냐고 퉁명스레 말하며 나서는 그들을 보면서 이젠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그저 내가 '올해 진짜 잘되려고 남을 도우면서 한 해를 시작하나 보구나. 그런데 저런 사람들이라니 좋은 손님들만 오려는 액땜이로군 허허.' 이렇게 생각하고 털기로 했다.


그러니까 호텔방에 들어간 시간은 새벽 5시. 2시간 뒤면 또 아침밥을 하러 나서야 했지만 밤새 큰 모험을 하고 돌아온 나는 호텔방의 온기에 녹아내려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꿈에서도 이 생각뿐이었다.


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렇게 나의 2017년 1월 1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손님들과 새해에 절대 밖에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또 분위기에 취해 손님들의 부탁에 이끌려 매년 열심히 밖에 나가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다만 좀 요령이 생겨 이제 두오모 광장이나 시뇨리아 광장에서 멈춘다는 것!


첫 해의 호기로운 새해맞이는 정말 다 같이 동사할 뻔했을 만큼 아찔했고 별별 에피소드가 다 생겨났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새해맞이였다는 걸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다.


문득 그립다. 그때 그 사람들.(용사들!!)



다들 2022년은 잘 맞이하셨나요? 행복하게 잘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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