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저 네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해

잠시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치유된다.

by 피렌체장탁



서른이 넘어가니 참 힘들일도 많다.


나 자신도 그렇지만 내 주변에도 큰 아픔을 겪었거나 멈춰야 할 때를 모르고 자신을 몰아붙이다 몸도 마음도 거의 탈진상태까지 간 친구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한국인의 특성상 아픈 걸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꾹 참기만 하다가 곪아가는 친구들을 볼 때면 늘 진심을 다해 말했다.


"친구야, 딱 한 달만 여기 와서 살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와서 한 달만 지내."


물론 한국에서도 잠시 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여유를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너무 힘이 들 때는 가까운 사람들의 위로도 눈치가 되는 경우가 생긴다.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위로의 말 '곧 괜찮아질 거야' '금방 지나가' '남들도 다 힘들어' '너 아직도 그래?'...

아픔을 위로하는 말에도 '곧' '금방' 등 '빨리'를 나타내는 단어가 붙는다. 물론 아픔이 빨리 지나가고 괜찮아지라는 진심 어린 마음이 담겨있는 말들이지만 그런 말들이 버겁게 그리고 무정하게 들릴 때가 있다.


"아니, 저는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괜찮지 않은데 그럼 어떻게 하죠???"


오랜 시간 힘든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눈치 보이는 사회,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빨리 툴툴 털어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칭찬받는 사회.(적어도 내가 겪었던 한국은 그랬다.) 그래서 종종 너무 힘들어지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공감이나 위로를 받기보다는 잠수를 선택하는 것이 낫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 너를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와서 오로지 너 자신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친구들에게 권하고는 하는 것이다.




S는 나의 가장 절친한 대학 동기의 와이프였다.

내가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린 나의 친구. 이들이 결혼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던 시점에 내 친구의 몸에 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또 두 달 정도가 지난 시점에 그는 와이프를 남겨두고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둘의 연애 시절에는 자주 볼 기회가 없어서 한번 지나가듯이 소개받은 것이 다 였다. 그들의 결혼식 때는 이제 막 이탈리아에 와 자리 잡고 있던 시점이라 차마 가 볼 수가 없었다. 섭섭해하던 친구에게 대신 너네 부부가 9월에 피렌체에 오면 내가 숙박, 식사, 가이드까지 풀 코스로 대접하겠다고 단단히 약속했었더랬다. 그때 놀러 오면 S와도 많이 친해지겠구나! 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친구의 장례식장에서였다. 한국 행 비행기표를 겨우 구해 12시간을 펑펑 울면서 도착할 때 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넋을 놓은 표정과 너무나도 야위어 바스러질 것 같던 작은 체구, 눈물조차 말라버린 것 같은 S를 보고 있자니 친구가 떠났다는 것이 바로 실감이 났고 억장이 무너졌다. 이전의 친분을 떠나서 대학 동기 모임 중 여자는 나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챙기는 일은 내가 맡게 되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같은 아픔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는 금방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3일 내내 붙어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말했다. 정리가 좀 되고 나면 피렌체로 오라고, 와서 좀 쉬자고.

그렇게 그 해 겨울, 함께 오기로 했던 피렌체에 그녀는 혼자 왔다.


처음에 그녀는 많이 망설였다. 내가 지금 유럽에 가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정리해야 될 일도 많고 거기 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고. 하지만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가족과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돈 때문에 변하는 모습에 질려버린 그녀는 결국 잠시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실 막상 온다고 하니 나도 막막하기는 했다. 이곳에 오라는 말은 본능적으로 뱉어버린 말이었는데 과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개인의 공간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물론 내 방이라는 공간이 있긴 했지만 좁고 열악한 환경이라 너무 무턱대고 초대했나 후회도 했었다. 손님이 많을 시기여서 내 몸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함께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애매하고 종일 집에 묶여있을 텐데 한국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오는 곳에 너무 많은 한국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이상 이런저런 걱정을 뒤로하고 하루하루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한 달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딱 두 번 본 사람이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엄청난 행운아인 것이다. 그리고 그 행운을 나는 2017년 12월 한 달 내내 경험할 수 있었다.

S가 온다는 부담감은 잠시 그녀가 오자마자 나의 삶은 180도로 달라졌다.

그 해 여름 친구가 떠나고 나서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나였다. 이미 받아놓은 예약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긴 했지만 겨우 버텨내는 수준을 면치 못했다. 제일 힘들었던 점은 손님들이나 이곳 피렌체의 친구들 앞에서는 늘 웃거나 밝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웃고 떠들어야 한다는 현실이 점점 나를 갉아먹었다.

S와 내가 이곳에서 한 일은 별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나서 잠들기 전 둘이 나란히 누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친구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알던 내 친구의 모습, 그녀와 연애하고 사랑할 때의 친구의 모습은 너무 상반돼서 절로 웃음이 났다.

" 아니, 그 XX 가 그런 짓을 했다고??? 어이가 없네."

그녀가 웃으며 울며 이야기해주는 연애 시절 에피소드의 말미에 난 늘 저런 소리를 했다.

" 말도 안 돼! 우리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엄청 짓궂었구나"

내가 이야기해주는 대학교 때의 에피소드에 깔깔대면서 S가 늘 했던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그를 추모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고 좋았던 시절을 추억도 하고 욕하고 싶었던 모습을 원망도 하고 6개월이 지났는데도 어제 같은 우리의 감정과 슬픔을 온전히 나눌 수 있었던 시간.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빨리 잊어야지, 죽은 사람 이야기해서 뭐하냐고 타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친구를 온전히 추억하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그렇게 매일 밤이 지나갔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치유되어 갔다.


어느 날 우리가 완벽히 타인임이 인지되는 어색한 순간들이 찾아오면 우리 집에 찾아온 많은 손님들이 그 사이의 공백을 채워주었다.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다 보면 우리가 지금 힘들어하는 일들이 툭 가볍게 느껴지고 나 참 잘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의 속을 알 턱이 없는 천진한 우리 손님들이 겉모습만 보고 짐작하는 나의 모습이나 S의 모습들이 낯설기도 하고 잊고 지내던 내 모습을 상기시켜주기도 했다.


맞아.... 우리 그냥 치킨에 맥주 좋아하는 평범한 30대 초반 여자들인데 말이야.


크리스마스 마켓, 베네치아, 피에솔레 언덕 등... 그녀가 내 친구와 함께 가고 싶었던 곳, 내가 맨날 친구에게 자랑했던 곳들을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조금씩 조금씩 눈물보다는 웃음이 늘어가는 우리였다. 처음 도착해서는 한 끼도 잘 삼키지 못했던 그녀가 돌아갈 무렵에는 내가 해준 닭볶음탕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이상한 말이지만 너무 빨리 가버린 친구에게 다 못 해주었던 내 마음과 우정을 갚는 기분이었다.

'여사친과 미망인'

이 이상한 조합의 우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시간만은 우리에게 꼭 필요했고 간절한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한 달을 같이 피렌체에 살았을 뿐이었다.



J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내 인생을 통틀어 내가 힘들었던 순간마다 그녀는 늘 내 곁에 있어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우리는 개학 첫날 운명처럼 옆 자리에 앉았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서기를 부탁했을 때 그녀가 나의 악필을 깔깔깔 비웃으며 놀려대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아는 J는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늘 열정적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남을 잘 믿는 사람.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고 남을 위해 특히 친구나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모두 내던질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장점이라 생각했던 J의 그런 모습이 바로 그녀의 삶을 갉아먹는 이유가 될 줄이야...

어린 시절부터 늘 성실했던 모습으로 기억되는 그녀의 오빠는 직업 군인이었다. 착하고 고운 심성 그대로 쭉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던 오빠는 군에서의 사고 이후 조금씩 틀어지지 시작했다. 구구절절 적을 순 없지만 어떻게 이렇게 운이 안 따라 줄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그 시기의 그에게 계속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고 큰 금전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처음에는 J의 부모님이 그런 오빠의 뒷수습을 해주었다. 그러나 일이 반복되자 결국 J가 힘들게 모았던 돈까지 가족일에 쓰이게 되었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복되는 오빠의 사고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는 기꺼이 오빠를 도왔지만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다.

2019년 1월 1일, 정확히 말하자면 2018년 12월 31일 그녀가 피렌체로 찾아왔다.

그리고 도착한 날 밤 나를 붙잡고 밤새 오열했다. 그전까지 통화로만 J의 일을 접하고 있던 나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평소 힘들다는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그저 쉬고 싶어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직접 본 J의 모습은 그녀의 사연을 단 한 줄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너무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퀭한 두 눈, 턱 밑까지 내려온 듯한 다크서클, 20kg이나 쪄버린 살, 푸석한 피부와 메마른 입술... 도저히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생기 넘치고 아름답던 그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특히 J가 우는 모습은 고3 때 진짜 좋아하던 첫사랑에게 잠수 이별을 당한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씩씩하고 당차던 내 친구였는데 날 보자마자 '아 나 진짜 너무 힘들어.'라고 토하듯이 오열하고 있는 것이었다. 억눌러왔던 슬픔과 힘들었던 그녀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다음 날부터 일어났다.

언제 그렇게 힘들어했냐는 듯이 다음 날 아침부터 그녀는 온종일 산책을 하며 온 피렌체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서는 자기는 이제 이탈리아 사람이라서 아침밥 대신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신다며 집 앞 카페에 나갔다. 예쁜 옷을 입고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고 있으면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가 말을 시킬 거라며 제대로 보지도 않을 이탈리아어 교재를 매번 챙겨서 말이다.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피렌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새롭게 알게 된 재밌는 장소들을 나한테 공유해주기 시작했다. 한 달쯤 피렌체를 돌아다니고 나서는 체력이 회복되었는지 이제 다른 곳을 정복하겠다며 시칠리아로 떠나서 한 달을 여행하고 오기도 했다. 시칠리아에 가서 현지인의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 심지어 그 현지인 본인이 아닌 그 남자의 부모님한테 '우리 집 며느리가 되어달라'는 프러포즈를 받고 선물을 잔뜩 받아 돌아오기도 했다. 그 다음은 리미니 한 달, 그 다음은 밀라노 한 달. 나도 들르기만 했던 여러 도시들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이탈리아 전국의 친구들을 사귀어 오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J의 얼굴을 밝아져 갔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는 생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따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는데도 살이 쭉쭉 빠졌음은 물론이다. 내가 알던 누구보다 순수하고 밝고 아름다운 친구의 모습이 돌아온 것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물었다.


"너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바로 괜찮아졌어?"


"나 그 힘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건지도 몰라. 큰 소리로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고 울고 나니까 그냥 다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어. 웃기지? 한국에서 2년 동안 그 한 마디 뱉어내고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유도 없이 살았어. 그리고 다같이 힘든데 그렇게 하는 게 부모님이나 특히 당사자인 오빠한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원망하는 마음도 컸는데 원망하면 안 되는 거라고 나 자신을 계속 눌러왔던 것 같아. 오빠 새끼 탓하고 욕하고 싶었는데 속 시원히 그거 하나 인정했다고 바로 다시 나가서 걸을 힘이 생기더라. 무엇보다 여기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 장소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 시간이 내 숨통을 트이게 했어. 원래의 내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났었는데 정처 없이 강가를 걸으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이 오르고 행복해지더라. 참 별 거 아닌 일을 왜 이렇게 하기 힘들었을까?"


"야, 언니가 여기 있어서 그래. 잘해라 나한테."

말 그대로 여기 살고 있었던 것 말고는 나의 역할은 아주 소소했거나 없었던 것 같다. 맨날 말도 안 되는 주제들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을 하고 그녀가 돌아올 때마다 좋아하는 된장찌개에 계란 프라이 밥상을 차려준 것 밖에는...

오히려 늘 그랬듯이 J가 있던 6개월 동안 나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그녀가 전국 각지에서 사귀어 소개해 준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소중한 인연으로 잘 이어져 오고 있고 어쩌면 그들을 알게 된 덕분에 코로나 시국에도 이곳 이탈리아에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J를 핑계로 그녀가 머무르는 도시들에 일주일 씩 휴가를 다녀왔으니 체력적으로 지쳐있던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휴식이었다. (아직도 J와 갔던 밀라노의 한 클럽에서 마주친 외국인 모델들과 춤췄던 그 밤이 나에게 이탈리아 최고의 밤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탈리아에 오고 나서의 나의 리얼한 삶의 현장을 진정으로 들여다보고 같이 지내면서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힘듦을 알고 공감해주었다. 나의 가장 친한 존재가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내 옆에 지내고 있다니!! 그냥 시차가 맞는 곳에 진짜 내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비용을 내줄 것도 아니면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무작정 이곳으로 초대하는 것은 어쩌면 무책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전문 상담가도 아니고 또 게스트하우스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저 훌쩍 떠나오는 것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와 위로의 힘을 믿는다. 이 마법은 꼭 내 지인들이 아니더라도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늘 느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잠시 한국을 떠나온 그들은 그냥 한낮에 야외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근심이 녹아내린다고 했다. 또 우리 집, 탁하우스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 힐링이 찾아온다고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솔직해질 수 있고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편견에서 벗어나 제 삼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기도 했다. 원래 남의 일은 명확히 보이는 법이니까.

물론 이 먼 해외까지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전혀 여유가 없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냥 국내에서라도 정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하고 오기를 추천한다. 혹은 마냥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잠깐 동안 익숙함으로부터 나를 차단하는 시간은 '나'를 잘 들여다볼 수 있고 현재 상황과 상관없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샜지만 결국 나는 여기서 지냄으로써 또 '피렌체 탁하우스'라는 공간을 운영함으로써 단 몇 명의 사람들에게라도 그런 휴식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주고 싶다.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로 조금 더 쉽게 떠날 결심을 할 수 있고 또 잠시라도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만 있다면 팍팍한 나의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 좀 더 보람차고 행복해질 것 같다.


물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놀러 와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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