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라고 이 놈들이 자꾸 이렇게 오나 싶다. 물론 반갑고 좋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신혼여행이잖아?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알콩달콩 신혼부부 티 팍팍 내면서 뽀뽀도 막 길거리에서 하고 이제 시작될 부부로서의 삶도 핑크빛으로 설계해 보기도 하고 그런 게 신혼여행 아니냐고...(노처녀의 로망인 건가)
전 직장의 후배 부부부터 친척동생 부부, 친한 동생의 오빠 부부 등 참 다양하게도 왔다.
지인들 뿐만이 아니다. 생각보다 신혼여행의 숙박을 민박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 2인실은 객실 내 전용 화장실이 있기 때문에 특히 신혼부부들에게 인기가 많다. 전 일정을 다 민박으로 잡는 건 아니지만 중간에 한식이 그리워 한 두 도시는 민박으로 예약했다는 분도 계시고 그냥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해서 민박집에 왔다는 커플도 있었다.
아주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는 인상의 한 커플이 있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음성도 말투도 무척 차분했다. 둘이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였는데 우리 집에서 10박이나 머무른다고 했다. 이유인 즉 남자분이 피렌체가 너무 좋아서 잠시 살기도 하고 자주 왔었는데 사랑하는 와이프에게 잠깐 관광으로 스쳐가는 피렌체가 아닌 살아보는 피렌체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로맨틱하기도 하고 남다르기도 한 계획이었다. 둘이 열흘 간 어떤 추억을 쌓을까 절로 궁금해졌고 부디 우리 집에서 편하게 잘 지내다 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근데 사장님, 여기 한인 슈퍼 같은 곳이 있나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네네. 제가 구글맵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의 양손에 든 봉지에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소주 10병이었다!
"이거 여기 공용공간에서 마셔도 되죠? 사장님도 좀 같이 드시라고 넉넉히 사 왔어요."
그렇게 해서 'SJW의 밤'이 시작되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누가 봐도 그 커플은 알코올 한 방울 접하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지만 분명 분위기란 게 있는 건데 이건 뭐 내가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본 것 같았다. 일단 소주 10병은 그 커플에게 넉넉한 양이 아니었다. 남편분 뿐만 아니라 아내분까지 정말 엄청난 주당이었던 것이다. 특히 아내분은 정말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연거푸 원샷을 해댔다. 며칠 두고 마실 거라던 말은 겸손이었고 우리는 그날 밤 그 소주 10병을 바로 클리어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첫인상과는 다르게 재밌고 짓궂은 면도 많은 친구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난 아침밥을 하다가 숙취로 거의 사망할 뻔했는데 너무도 멀쩡한 얼굴로 아침식사를 하는 그 커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나도 어디 가서 나름 술 세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친구들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놀랍게도 일정을 마치고 온 그들의 손에는 또다시 소주 10병이 든 봉지가 들려있었다.
"헉!!! 한 번만 봐주세요! 열흘이나 계시잖아요. 맨날 이러면 저 죽어요"
"아 사장님, 억지로 안 드셔도 됩니다. 아 그럼 오늘은 우리 둘이 가볍게 맥주랑 와인 마실까? 이틀에 한 번은 가능하시죠?"
"아? 네.... 이틀에 한 번은... 네.."
이런 정직하고 꾸준한 친구들을 봤나. 내가 힘들다고 한 다음날부터 정확히 이틀에 한번 소주 10병씩을 사 오던 그 커플. 6-7일 차부터는 검은 봉투만 봐도 약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또 그만큼 그들과의 시간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 피렌체에 살아보는 느낌을 선물하고 싶다던 남편분은 피렌체 라기보다는 '탁하우스'에서 생존이 걸린 '음주 서바이벌' 체험을 선물했던 것 같다. 그 커플이 체크아웃하던 날 나의 간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내 영혼만큼은 진정한 술친구들을 찾은 것 같아 기쁨으로 가득 찼다.
"사장님 한국 오시면 무조건 우리 집 놀러 오세요! 제대로 'SJW의 밤' 보여드립니다."
"아니, 이것보다 더 제대로 보여준다고?? 숙취해소제 한 박스 사 가지고 가야겠네."
그렇게 그들은 떠났고 얼마 뒤 임신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쌍둥이를 낳아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모습을 인스타로 보고 있는데 쌍둥이 육아 때문에 그때만큼은 술을 못 마시겠지라고 지레짐작을 해본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그들이라면 아직도 소주 10병을 둘이서 다정히 나눠 마시는 모습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후배는 입담이 좋기로 회사에서 유명했고 같은 팀에서 지낼 때 나를 유난히 따르는 친구였다. 아내분은 이야기로만 많이 들었는데 신혼여행을 온다고 해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그 후배의 동기인 다른 후배한테도 연락이 왔다. 자기들도 신혼여행을 피렌체로 온다고 했다. 너네 짠 거지?
평생 기억될 만한 장면이다. 남자후배들과 그들의 와이프 그리고 나. 이 어색한 조합이 티본스테이크 레스토랑의 큰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런 심정 반, 그래도 후배 녀석들 여기까지 찾아와 준 게 고맙고 반갑다의 마음 반으로 고기를 썰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들 중 한 커플과는 미켈란젤로 언덕에도 함께 올랐다. 저 멀리 보이는 석양을 뒤로하고 광장에서 귀여운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사진사를 자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자 맥주 한 병씩을 손에 들고 계단에 앉아 음악을 틀고 피렌체 전경을 내려다보는데 참으로 주책스럽게도 울컥 눈물이 났다.
"뭐야, 왜 그래요 선배?"
"아.. 몰라. 이상하게 행복하네?"
남의 신혼여행 일정에 껴서 그것도 제일 로맨틱하게 기억될 미켈란젤로 언덕까지 같이 가서 울고 있는 나 자신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날의 몽글몽글하고 따뜻했던 감정이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너무 좋아하는 후배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하는 모습이 예쁘기도 했고 참 좋은 사람들끼리 만난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에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쁘기도 했던 것 같다.
친척동생 부부가 왔을 때는 2호점을 막 오픈한 시점이었다. 마침 우리 제부가 차를 렌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그러면 안 됐지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 너네 신혼살림 다 장만했어? 피렌체 이케아 궁금하지 않니? 구경 갈래?"
이렇게 반 강요로 인해 이들의 유럽 신혼여행 일정에 뜬금없이 이케아 나들이가 추가되었다. 너무 미안하긴 했지만 당시 내가 국제 운전면허증이 만료된 상태라 멀리 떨어진 이케아에 가기 위해 운전할 수 있는 인력과 차량이 간절했었다. 다행히도 동생 부부는 쇼룸을 보면서 자기들 신혼살림을 구상하기도 하고 한국과의 가격도 비교해보면서 그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내 동생이 카트에 살짝 발을 올리고 제부가 뒤에서 밀어주는데 딱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마트에서의 신혼부부 모습이랄까.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계속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한국 가서는 동생들한테 뭘 그런 걸 시켰냐고 양아치냐고 욕을 좀 먹긴 했지만 정작 그 부부는 현지 체험 제대로 했다면서 재밌어했던 기억이 난다.
왜 여기까지 신혼여행을 와서 날 괴롭히냐고, 투덜투덜 대던 나였는데 사실은 그들에게 가장 특별하고 행복하게 기억될 추억 속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던 것 같다. 다른 기억은 다 헷갈리고 잊어도 신혼여행 때의 추억은 분명하게 기억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굉장히 높은 확률로 많은 사람들의 가장 행복했던 추억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건 흔치 않은 행운이다. (좋은 기억 맞겠지?)
비록 의도치 않게 자꾸 친구들이나 지인들 신혼여행에 함께하게 되어 '신혼여행 브레이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뭐 어떨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