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일 그리고 잠수이별

뇌졸증이라니..허허

by 피렌체장탁

토끼 아저씨와 부서진 침대, 통하지 않는 대화...


많은 이유가 있었음에도 나는 Jo와 계속 함께 하길 원했다. 그가 완벽한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스쳐갔던 나에게 플러팅을 날린 수많은 할배들과 알고 보니 유부남이라던가 혹은 레스토랑 웨이터 들에 비하면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고 적어도 나를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에 와서 보니 직업이 있는 게 어디냐.. 싶을 정도로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들이 많았는데 요즘 뭐 하냐는 질문에 그들은 한결 같이 "지금 잠시 쉬고 있는 중이야." "관심이 생긴 분야가 있어서 요즘 배우고 있어." 등을 핑계로 거의 일 년 내내 놀고 있었다. 일은 하고 안 하고는 그들의 자유이지만 데이트 3시간 동안 5유로짜리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거의 마시다 뱉는 수준으로) 버틴다거나 하는 건 정말이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Jo는 프리랜서긴 하지만 찾는 데가 많은 나름 잘 나가는 건축업자였고 데이트할 때 나에게 한 푼도 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고리타분한 면도 있었는데 그게 또 싫진 않았다.

내가 돈을 내려고 하면 늘,


"벨라, 너 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나한테 이런 귀한 시간을 내주는 것 만으로 이 돈보다 훨씬 큰 가치가 있어. 넌 여기 나와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에게 행복을 주고 있어."


라는 달콤한 멘트를 날리는데 어떤 여자가 넘어가지 않겠냐는 말이다. 내가 느낀 이탈리아 남자들의 특성 중 하나가 말을 참 로맨틱하고 예쁘게 한다는 것인데 그게 또 좋을 때는 참 좋다가도 결국 말 뿐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이 주제로 이야기하면 또 백만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다.


이렇듯 Jo는 데이트 상대로는 정말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 이상을 바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걸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


내 생일은 나에게 있어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이다. 나는 정말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Jo와 함께 하게 된 그 해의 생일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 특별한 이벤트를 바란 게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단 둘이 보내게 될 하루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었다.


역시나 바빴던 Jo는 밤늦게나 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친구들과 먼저 레스토랑에 가서 생일파티를 했다. 맛있는 해산물을 먹으면서도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오매불망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표현이 꼭 맞을 것이다. 곁에 좋아하는 친한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Jo의 메시지가 오면 언제든 그들을 버리고 당장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녁식사를 다 마치고 2차로 우리 집으로 가서 만취상태가 되기 일보 직전 까지도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


다른 날이었다면 그냥 이 새끼 또 이러네 하면서 기다림을 접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았겠지만 생일이었기 때문에 '에이, 설마. 오겠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그를 기다렸다. 내 속도 모르고 취기와 흥이 오를 데로 오른 친구들은 클럽을 가자고 했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친구 하나가 생일선물로 테이블을 잡고 바틀까지 쏜다고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나갔다. 한편으로는 반발심도 생겼다.


' 내가 진짜 오늘 가서 엄청 멋있는 남자 꼬시고 나서 너 버린다. 두고 봐라.'


클럽에서 열심히 몸을 흔들어 대면서도 한 손으로 핸드폰을 꼭 잡고 놓질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새벽 한 시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또 무슨 급한 일이 생겼었다는 흔한 변명이었다.


"그래서 너 지금 올 거야 말 거야?"

"나 클럽에 가기엔 너무 힘들고 네가 나올래? 데리러 갈게."


자존심도 없지.. 나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신나게 놀고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클럽을 뛰쳐나왔다. 조금 지나자 Jo 가 해맑게 웃으며 나타났다.


빈 손이었다. 기대를 전혀 안 했다고는 못하겠다. 어쨌든 빈 손이었다.


그렇지만 만난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았던 나는 어디로 갈지 물어보았다. Jo는 너무 피곤하다고 그냥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사실 갈 만한 곳도 없을 새벽이었기 때문에 나도 동의했다. 집에는 마실 물 한 병조차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냥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날 좋아하는 남자랑 보내는 생일이 참으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우리는 집에 가자마자 몸의 대화를 진하게 나누었다. 그는 마치 그게 선물인 냥 평소보다 더 격렬했고 열심이었다. 막 절정에 도달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아악! 오 쉣!!!!! 잠깐!!"

"헉.. 무슨 일이야??"

"오 맘마미아. 나 뇌졸중 올 뻔한 거 같아. 방금 머리에 전기가 느껴졌어."


그의 오른쪽 머리와 눈 쪽에서 감전된 것 같이 전기와 통증이 느껴졌고 눈도 갑자기 침침해졌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옷을 다 입더니 자긴 응급실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벌거벗고 있었던 터라 옷을 주워 입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아냐, 넌 여기 있어. 네가 왜 같이 가?"

"응?? 당연히 같이 가야지. 너 지금 어떻게 가려고 그래? 보호자가 있어야지."

"여기서 응급실은 10분 거리도 안돼. 나 혼자 가도 충분하다고. 넌 그냥 있어."

"아냐. 하지만 너 방금 뇌졸중이 올 뻔했다며. 가다가 또 그래서 쓰러지거나 걷지 못하면 어떻게 해? 그리고 너 피렌체에 혼자잖아. 어떻게 됐던 내가 같이 가야지."

"괜찮을 거야. 넌 그냥 집에 있어. 내가 의사 만나고 나서 연락할게, "


그렇게 나는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바이크를 타고 갔다. 어쩌면 그는 날 배려하려 한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점점 그가 정말 어떤 증상을 느낀 건 맞는지 아픈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뇌졸중이 올 거 같고 눈이 침침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 새벽에 바이크를 타고 가는지 그리고 굳이 나를 떼어놓고 가는 것도 수상했다. 모든 게 핑계같이 느껴졌고 심지어 이 사람 사실 유부남이라서 나를 보호자로 못 가게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어 부정의 끝까지 갔을 때 그리고 그를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느끼는 순간 이 모든 것을 끝내야겠다고 결심이 들었다.


새벽 세 시가 조금 지나고 나서 Jo에게 연락이 왔다. 의사를 만나서 약을 받았는데 괜찮을 거 같다고. 그냥 요즘 너무 무리하고 피곤해서 그런 증상이 일어난 것 같다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는 그 상황에 대해서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문자를 받으면서도 나는 또 의심을 하고 있었다.


' 기본 6시간 이상 기다리는 이탈리아 응급실인데 한 시간 만에 다 끝난 것도 이상해. 그리고 뇌 쪽 이상이 느껴져서 갔으면서 MRI나 CT 촬영도 하지 않고 괜찮다고 한다고? 병원 안 갔네.. 그냥 집에 가야 되는데 생일이라니까 도장(섹스) 찍고 튄 거네.'


'우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어떤 한 명이 갑자기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 이럴 순 없다. 병원에 같이 가야 되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걸 못 가게 막는 게 이상한 거다. 이건 뭐 남보다 못하잖아. 심지어 같이 있다가 그런 건데. 그리고 설사 혼자 가게 되었더라도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걸 가지고 오만가지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으로 밤을 지새우는 나는 정상이 아니다. 나를 미쳐가게 하는 관계는 나에게 독이다.'


그래서 이별을 결심했다.


그전부터 서서히 쌓아오던 관계에 대한 불만과 의심이 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그에게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말한다 해도 또다시 끝없이 다른 핑계를 대거나 혹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세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곤했다. 이걸 다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서 이별을 해야 하나 싶었다.


비겁한 선택을 했다. 그냥 그를 무시해야지... 어차피 그에게 나는 가벼운 관계였을 거야. 나만 혼자 생쇼를 한 거지.. 혼자 지레짐작하고 혼자 판단했다.


죄책감은 없었다.

그저 내 생일을 망치고 나를 이상하게 만드는 그가 죽도록 미웠을 뿐이었다.


상처받기 싫은 나의 비겁한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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