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회가 오자 그가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다.

by 피렌체장탁

잠수 이별 이후 생각보다 나는 괜찮았다.

내가 그를 좋아한 것이 맞는지 의아스러울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그가 내 인생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나의 일상은 아무런 지장없이 흘러갔다.


이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힘든 일들이 생겼다. 오랫동안 살았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되었고 그곳은 나의 거주지 이자 비즈니스 공간이었기 때문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더더욱 그랬던 것이 믿었던 이탈리아 친구의 뒤통수로 일어난 일들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에 대한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너무 막막해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때 순간적으로 Jo가 떠오르긴 했지만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그 상황을 극복하느라 바빴고 어찌어찌 지나왔다. 아직은 이탈리아에서 조금 더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피렌체에 남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내가 의도하는 바 대로 나의 인생은 흘러가더라... 남고자 했더니 남을 수 있게 되었단 소리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 연애고 이별이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Jo와 함께 했던 시간이 아득히 먼 과거의 일로 느껴졌다. 이런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와 멀어진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6개월 만에 그를 다시 슈퍼마켓에서 마주쳤던 것이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던 내 심장이 요동을 쳤고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를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건네는 따스한 위로의 말에 눈물이 났다.


그에게도 힘든 일이 있었다고 했다. 밀라노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몇몇 규칙을 어긴 게 적발되어서 공사가 멈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일한 기간만큼의 페이는 지급되어야 하는데 오너 쪽에서 힘들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돈을 주지 않고 있다고 했다. 피렌체에 돌아와서 다른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정말 열정을 다해해 왔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상실감이 크다고 했다. 나와의 관계를 망칠 정도로 몰입했던 일이었기에 더더욱.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힘든 일을 겪었다는 데에서 또다시 연민과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번에는 정말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기 전에 이전에 내가 왜 그랬는지와 내가 느꼈던 감정 그리고 내가 바라는 관계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고 이걸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너무 당연하게도 자기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너와 함께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면 제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는 내가 원하는 이상형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곁에 있을 수 있는 편안한 사랑을 찾고 있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내가 그런 사람인지 그리고 나도 그런 관계를 원하는지 그도 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확실히 대화가 부족했었던 것 같다.


새로 이사 한 집으로 그를 초대했다. 근사하진 않지만 그가 좋아할 것 같은 한식 메뉴로 식탁을 가득 채웠다. 그는 아주 맛있는 와인을 두 병 가지고 왔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에게 음식을 해준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가 초대할 때마다 안 온 탓도 있지만 나도 피곤했기 때문에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도 맞다. 불고기, 잡채, 만두, 비빔밥, 어묵탕 등 5가지가 넘는 메뉴였는데도 그는 그걸 다 비워냈다. 이런 저녁식사를 대접받는 것이 너무 영광이라고 자신은 행운아라고 말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잘 먹고 잘 마시는 그가 새삼 예뻐 보였다. 이게 참 사람이 웃긴 게 처음에도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가 그에게 불만이 쌓여갈 때에는 그 모습이 게걸스럽고 미워 보였다. 나도 날씬하진 않았지만 살이 쪄가는 그의 모습이 불만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이토록 옹졸하고 간사하다. 아니 나의 마음이.


그는 재회 후 세 번 나를 만날 때 까지도 나를 만지지 않았다. 너의 목적이 오직 섹스인 것 같다고 느껴졌다는 내 말이 꽤나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란 걸 보여주려는 듯 그는 참고 또 참았다. 너무 집에서만 데이트하는 게 불만이었다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었던 것 같다. 틈만 나면 바이크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거나 점심때 잠시 시간이라도 나면 가성비 좋고 맛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면서 나를 초대했다. 그가 데리고 간 미켈란젤로 언덕 뒤편에 위치한 아주 조용한 남의 동네에서 석양을 보며 우리는 아주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주 진하게 재회 키스를 나누었다.


그는 정말 내가 한 말 하나하나를 다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는 이제 피렌체에 머물며 일을 하고 있었고 그전 보다 시간도 많았다. 그리고 그전 해에 너무 바쁘게만 살아서 사랑도 잃고 건강도 해친 거 같다며 다신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단단히 결심했다고 했다. 이제는 나의 친구들과의 식사자리나 술자리에 초대를 해도 기꺼이 참석했다. 친구들과도 꽤나 잘 어울렸고 친구들도 다 그를 좋아했다.(처음에는)


' 아... 원래 이런 애인데... 그때 정말 너무 바쁘고 아파서 그랬던 걸까? 내가 참 못됐었네. 그때도 열심히 대화를 해보려고 했으면 달라졌을까?'


시간 약속도 잘 지키려고 노력했고 내가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언제든지 달려왔다. 너무 노력하려고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고 미안할 정도로 그는 노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깨진 조각 하나가 빠진 것 마냥 내 마음은 예전 같지 않았다. 분명히 그가 내가 바라는 모습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데도 고마울 뿐 애정이 생기진 않았다.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Jo와 함께 있으니 든든하고 외롭진 않네...라는 생각이 다였다. 이런 내 마음을 그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가끔 아주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도 습관처럼 그는 이야기했다.


"난 너와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물론 나도 그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 행복하긴 했다. 늘 현재의 상황보다 나의 욕심이 더 큰 것이 문제인 걸까. 이 쯤되면 처음에도 그리고 다시 만난 후 에도 내가 문제인 게 아닌가 싶었다. 내 입맛에 조금만 맞지 않아도 금방 식어버리는 나... 관계에 대한 어떤 노력을 하기엔 너무 에너지가 없고 불안정한 나 자신 말이다. 예전에 내가 했던 연애를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내 모든 에너지와 시간, 몸과 마음을 미련할 정도로 쏟아부으며 상대방에 맞춰 갔던 것 같다. 그런 연애들에 질리고 지쳐서 인지 더 이상 남자에게 노력하고 싶지 않아 진 걸 수도 있다.


자.. 나는 그간 살면서 부서지거나 닳아져 이런 모양이 되었으니 네가 맞출 수 있다면 한번 맞춰볼래?


그리고 아직까지도 남들 앞에서는 나를 'Amore'라고 부르지 않는 그의 애매한 태도도 문제였다. 공식적으로 '땅땅땅' 한 관계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내 친구의 이탈리아 남편이 너네 어떻게 되고 있나고 물어보니까 한다는 이야기가,


"난 아직도 그녀가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어."


라고 했단다. 아니 뭘 나한테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결정하란 말인가. 그것도 그냥 핑계와 상황모면으로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를 나의 'Fidanzato'라고 말해 본 적이 없었고 그 역시 나를 자기의 'Fidanzata(여자친구)'라고 공식적으로 소개한 적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가 이렇게 나한테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계속 내 마음에 걸렸다. 그의 'Fidanzata'가 아닌 이상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로 더 이상 그를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이 문제 말고도 너무 많은 불만을 쏟아내면서 시작한 터였다.


그래서 그냥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관찰자의 시점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는 달라졌지만 나도 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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