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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Dec 30. 2023

나는 그를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았다.

고무신은 싫어요.


 충격적인 군대 소식을 듣게 되고 정신 차려보니 남은 시간이 한 달 반도 남지 않았다.

'그냥 사귀고 기다린다고 말할까?'라는 생각이 0.0001초 들긴 했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무신이라니.... 말도 안 될 일이었다.

 J를 좋아하는 마음은 확실했지만 군인 남자친구는 정말 감당 안될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군인을 거부하게 된 이유는 나의 오지랖이 불렀던 대참사 때문이었다.


 1학년 2학기가 되자 친하게 지내던 많은 선배 오빠들이 군대를 가기 시작했다. 이제 막 정을 붙이기 시작했는데 2년 넘게 못 볼 걸 생각하니 서운하기도 했고 그때까지 '친구', '의리'가 인생의 큰 모토였던 나였기에 그놈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금만 친해도 훈련소 입소날 배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논산, 의정부 등등 여자친구도 아닌데 졸래졸래 쫓아가서 눈물을 흘리고 훈련기간 끝나기 전에 편지도 당연히 써주고 군대 갔다고 바로 쌩까는 다른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며 수신자부담인 콜렉트콜 전화까지 꼬박 받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에 이게 소문이 났다.


 "야, 장탁한테 전화하면 다 받아준대. 편지도 잘 써주고!"


  심심하고 외롭고 고됐던 20대 초반 군인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니었을까. 친하지 않은 선배들한테도 전화가 오기 시작했고 거절이라고는 할 줄 몰랐던 나는 그 모든 전화를 받았고 그러다가 그들의 요청에 의해 편지도 써주고 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걔 중 몇몇은 진짜 친했고 진심이었지만 형식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선배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럼에도 전화를 안 받기가 참 미안했다. 어느새 핸드폰비는 수신자부담으로 인해 십만 원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얻어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집 우편함에 와있는 발신지가 강원도인 편지도, 그 안에 선물이라고 들어있던 건빵에서 나온 별사탕도 다 이미 지긋지긋했던 내가 그 상황에서 군인 남자친구라니...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게다가 나름 밀당 작전이랍시고 나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다, 그냥 친구다 이런 말을 밥먹듯이 해댔으니 애매한 사이이기도 했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확신이 없었다고나 할까.


 이런 시끄러운 속사정도 모르고 그놈은 이런 멍소리를 시전 했다.


"나 훈련소 갈 때 따라오지 마. 그냥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어. 너도 오지 마. 그리고 너 다른 남자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있어! 내가 전역하고 다시 뺏으면 되니까."


 문제는 내가 이런 그의 말에 감동을 받고 다시 반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헛소리라며 비웃을 말이지만 그때에는 저 자신감과 박력 있는 모습이 멋있었다고나 할까.


 한 달 반을 아쉬움과 애달픈 마음으로 그렇지만 덤덤한 척하며 보내고 그는 군대에 갔다.


그리고 그의 말을 너무 잘 들어버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것도 C.C였다. 01학번 선배였다. 이제 막 복학했던 조용한 사람이었다. 군인 케어에 더불어 복학생들 학교 적응시키기에도 열심이었던 나는 복학생 오빠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런 술자리 중 하나에서 만나게 되었다. 멋있진 않았지만 귀여웠고 제일 큰 건 나도 C.C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 놈은 훈련소 때 편지 한 두통을 제외하고는 100일 휴가를 나와서도 연락이 없었다. 분명 휴가를 나온 것 같은데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나는 소위.... 그러니까... 삐졌다.  단단히 삐졌고 진짜 다른 남자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들 무렵 이 오빠가 나타난 것이었다. 막상 사귀고 나니 배울 점도 많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취미가 잘 맞았다. 나는 사실 독서가 취미였는데 소설, 만화, 수필, 자기 계발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오빠도 책을 무척 좋아했다. 학기 내내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던 내가 책을 좋아한단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코웃음을 쳤는데 오빠는 그런 나를 잘 받아들여 주었고 겨울날 귤을 잔뜩 사가지고 오빠네 집에 놀러 가서 만화책을 빌려보며 뒹굴거렸던 게 따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6개월 즈음 만났을까. 오빠는 진짜 나보다도 책을 너무 좋아했던 것. 같이 종각의 영풍문고에 가서 데이트를 하는데 2시간이 넘도록 책을 읽는다고 나를 찾지 않는 모습을 보고 따져 물었다가 헤어지자는 소릴 들었다. 그렇게 책에 밀려 서점에서 이별을 맞이했다.


 그 뒤에도 과 미팅이나 동아리 모임이 있으면 거절하지 않고 다 참석했다. 그럼에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J 가 있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무 자르듯 뚝딱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 사귀어도 보고 짧게 썸도 타보고 했지만 이상하게 J가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 확신만 드는 꼴이었다. 늘 너무 보고 싶었고 어쩌다가 전화라도 오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1분 1초가 아쉽고 통화가 끝나면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깜깜하게 불 꺼진 천장에 대고 혼잣말로 나 너 좋아한다고 외쳐보기도 했다.(다행히 이때쯤에는 동생과 같은 방을 쓰진 않았다.)


 그런 마음을 외면하고도 싶었다. 어차피 군대 가서부터 연락도 자주 없는 놈한테 정을 줘서 뭐 하나 싶었다. 하나도 반갑지 않은 다른 군인 놈들의 전화는 뻔질나게 오는데 이상하게 그에게만은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래도 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033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빼놓지 않고 받았다. 자다가도 받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년이 다 될 때까지 그를 전혀 볼 수 없었다. 면회를 오라고 해도 나는 갔을 터인데 그런 소리도 없었다. 심지어 휴가를 나와서도 만나자는 말도 없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정리하자고 수백 번을 다짐했지만 그 마음이 쉽게 접히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기다리는 마음이었으면 그냥 관계라도 확실히 하고 여자친구로서 기다릴걸... 다른 사람도 이젠 못 만나겠고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가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나에게 마음을 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생각 없이 사귀어보기도 했다.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냥 착한 사람들 상처 주는 꼴 밖에 안 됐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모든 걸 그만두고 그의 전화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럽 배낭여행을 가게 되었다.

90일 간 정말 배낭 하나 매고 돌아다녔다. 처음 혼자 떠나보는 장기 여행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처음 가보는 나라들의 경이로운 풍경과 문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의 교류, 혼자 매일매일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성장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값진 경험이었다. 그런데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길어진 여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외로워질 때 떠오르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J였다.


 도시마다 엽서를 사서 그가 그리울 때마다 썼다. 그리고 그의 부대로 보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럽에서 엽서가 온 게 당시에는 대 사건이었고 군대 부대원들로부터 엄청난 부러움을 샀다고 했다. 더 이상 이 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 여행의 끝자락 즈음 하나의 결심이 섰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다음에 그를 만나면 고백을 해야겠다.'


 군대 간 지 1년이 좀 지나고 나서는 제법 자주 연락이 오기 시작했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서 다음 휴가를 나오면 꼭 만나자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쿨한 척, 아닌 척은 이제 안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제목이 잘못된 것 같다.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은 '척' 했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가슴이 터지도록 아리게.




비하인드.

그토록 군인들에게 시달렸지만 인생 모를일이다. 자소서에  꼭지로 '군인들의 수호천사 OO' 이란 제목으로 그들의 정신건강을 책임졌던 에피소드를 썼고  이야기가 임원들의 향수를 자극했던 건지 주목을 끌며 대기업에 합격하게 되었다.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다시 한번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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