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미 너에게 빠져버렸는걸.
닭갈비 볶음밥이었다.
닭갈비를 먼저 먹고 나서 나중에 볶아주는 볶음밥이 아니라 애초에 처음부터 닭고기 몇 덩어리와 야채와 밥을 볶아서 철판 볶음밥처럼 판매하는 메뉴였다. 당시 1인분에 2,500원인가 3,000원인데 양도 많고 맛도 있어서 가난한 대학생들의 배를 양껏 채울 수 있게 해 줬던 은혜로운 곳.
주머니 가벼웠던 친척누나? 가 후배를 데리고 간 곳은... 우리 둘이 처음으로 함께 먹은 로맨틱한 음식은 바로 그 닭갈비 볶음밥이었던 것이다. 김가루에 참기름 팍팍 뿌려주는 곳이라 아마 먹고 나서 고춧가루와 김가루가 한껏 나의 치아를 장식했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어쨌든 단무지는 무한리필이니 팍팍 먹으라며 인심 쓰면서 6천 원의 행복으로 우리는 맛있는 한 끼를 먹었다.
진짜 밥 사주는 거냐는 문자가 왔을 때 광대가 폭발하는 줄 알았다. 술에 너무 많이 취해서 기억도 가물가물 했던 데다가 그도 그냥 지나가는 말로 생각하고 연락이 없을 수도 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선문자가 온 것이다. 그때에도 밀당이라는 것은 존재했기 때문에 너무 빨리 답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고 빨리 문자에 답을 하면 내가 지는 거니까. 잘생긴 남자를 꼬시려면 쿨한 척 관심 없는 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일부러 툭툭대며 답장을 했다.
"아, 진짜 사달라고요? 뭐 먹고 싶은데?"
"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다 잘 먹어요. 설마 말만 하고 쌩까려고 한 건 아니죠?"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진짜 연락올 줄은 몰랐네? 그래서 누구누구 같이 먹어요?"
('제발 혼자와라 혼자. 혼자라고 말해라. 둘이 먹자. 제~~~~~~~에발!)
"저 혼자 가야죠! 저만 사준다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그리고 저 친구가... 없어요."
"(푸하핫 예쓰!) 친한 동기 있으면 같이 오라고 하려고 했지. 알겠어요. 그럼 내일 수업 몇 시에 끝나? 끝나는 시간 맞춰서 군자관 앞에서 볼까?"
별로 고민하지도 않은 채 닭갈비 볶음밥집으로 데려간 이유는 그냥 그곳이 나의 최애 맛집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는데 진짜 맛있었는지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우는 그의 모습에 호감도가 한층 더 올라갔다.
"저 진짜 아는 사람이 몇 없어서 그냥 수업만 듣고 집에 가거든요. 여기도 처음 와보는데 진짜 맛있다!"
맨 정신에 이야기해 보니 나는 친척도 누나도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성씨지만 본적이 달랐고 J는 한 학번 후배였지만 다른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재수를 한 터라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선배'라고 호칭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왠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돼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을 재치 있게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잘생기고 웃긴데 왜 친구가 없지? 의아했다.
점심을 먹은 후 나는 야구장으로 알바를 가야 했기 때문에 아쉬웠지만 밥만 먹고 헤어졌다.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바래다주는 내내 그가 너무 재밌었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100번은 넘게 했다.
'이 녀석, 나에게 빠져들었구먼.'
버스에 앉아 창문을 보았다. 그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문자를 시작으로 정말 우리는 자는 시간 빼고 한 순간도 연락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빠져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급하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문자를 하고 밤에는 통화를 했다. 그때까지 나는 여동생과 방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통화에 동생이 아주 질색을 했다. 핸드폰 요금제가 지금처럼 무제한 통화 이런 게 아니었기 때문에 집 무선전화를 거실에서 몰래 가지고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 밤새 시시덕거렸다. 전화기가 뜨거워져서 한쪽 귀가 빨갛고 멍멍해질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앗! 뜨거워하면서 방향을 바꾸고.. 그렇게 또 한 시간. 우리 집은 밤새 통화 중이었다.
로맨틱한 통화는 아니었고 주로 말장난과 그때 표현으로 서로 갈구는 내용이 주였는데 그게 참 웃기고 재밌었다. 끝내주는 티키타카에 케미였던 것. 외모도 외모지만 그냥 그와 닿아있는 모든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한마디한마디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친한 선배라는 포지션을 일부러 강조했다.
"야, 너 네가 엄청 잘생긴 줄 알지? 약간 한 3일 보면 질리는 잘생김이거든? 나를 봐. 얼마나 좋아. 처음에는 모르지만 한 번 빠져들면 점점 예뻐 보이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모라고. 이렇게 인기 많은 선배가 놀아주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후배여"
"어.. 아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나 잘생기지 않았어? 나 싫어? 괜찮지 않아?"
"아 그렇다고 쳐. 잘생겼다고 쳐. 이뻐 아주"
그때는 그게 꼬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나야 뭐 그게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는데 이 녀석도 분명히 날 좋아하는데 너무 티가 나는데 좋아한다고 말을 안 하는 거다. 그렇다고 바람둥이라서 어장관리한다고 하기엔 주변 관계가 너무나 투명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없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니었고 친한 동기가 딱 한 명 있는 정도인데 걔랑도 밥 한 끼 잘 안 먹는 사람이었다. 완전 '아싸'인 데다가 수줍음이 많고 얼굴값 못하고 자신감도 좀 없는 편이고 마음을 열면 친한 사람 앞에서만 까불거리는 성격이었다.
그런 애가 나하고는 밥도 자주 먹고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야구장에 자주 놀러 오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일부러 마셔주고(맥주 한 모금에 얼굴이 빨개졌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웠다.) 맨날 문자하고 밤새 통화를 하면서 정작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었다. 속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데 둘이 썸 타는 건 또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이럴 땐 직접 부딪히는 게 직빵이지!
"너 왜 나 좋아한다고 안 해? 엄청 좋아하는 거 티 나는 거 같은데."
"그럼 넌 왜 말 안 해? 너야말로 티 나는데. 나 안 좋아해?"
"아니. 난 너 좋아하지. 넌 너무 웃겨서 좋아.(이 말은 왜 붙이는 거니 그 시절 장탁아..)"
"아.. 근데 사실 나 말할 게 하나 있어."
"어? 뭔데?? 말해봐. 이 누나가 다 들어줄게!!!"
아... 헉... 윽...... 깜박했다. 군대.... 군대가 있었지. 방심했다. 게다가 원래라면 3학년이었을 나이니까...
이 상노무 자식!
곧 군대 갈 놈이 여자나 만나고... 뭐 하는 짓이냐고!!!!!!!!!!! 그걸 왜 이제 말하냐고!!!!!!!!!!
이미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군대 2년은 도무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나의 핑크빛 대학교 씨씨의 미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