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6개월도 못 기다리는 여자야?
드디어 그가 휴가를 나왔다. 전역을 6개월쯤 남긴 시점이었다.
군대 가고 1년이 좀 지났을 즈음부터 그리고 내가 유럽여행에서 엽서를 보내준 것을 계기로 우리 사이는 다시 조금씩 더 친밀해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전화를 했고 자연스레 다음 휴가 계획을 같이 세우고 있었다. 그가 나오는 날을 디데이로 삼아 다이어트를 하면서 꼬박 7일을 물만 먹으며 단식을 하기도 했다.
머리를 민 J는 못생겼기를 바랐다. 그를 너무 좋아했지만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다른 남자를 사귄 건 나였지만 왠지 그와의 관계에서 늘 자존심이 상했다. 나만 늘 안달 나 있는 느낌. 그저 짧고 강렬한 감정이었기를... 그래서 군인이 된 그를 보고 나면 차갑게 이 마음이 식어버리기를 바랐다.
안될 걸 알아서 더 바랐던 걸까.
1년 만에 본 그는 빡빡이인 주제에 엄청 잘생겼더라. 짧아진 머리는 그의 작은 얼굴과 섬세한 이목구비를 더 돋보이게 했다. 하얀 피부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붉은 입술도 더 시선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다소 마른 체형이었던 그는 군대에서 규칙적인 생활과 식단을 해서 그런지 조금 근육이 붙어 보였다. 특히 팔뚝이 꽤나 듬직했다.
'아.. 망했다. 멍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휴가를 나오자마자 그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그의 소꿉친구들이었고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나는 그 어색함을 견뎌냈다. 오직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열흘 남짓한 휴가에서 내가 제일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싶었다. 소꿉친구들과의 여행에 나를 초대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고백으로 느껴졌다. 내 마음은 저만치 앞서 이미 그의 여자친구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 친구들한테 나를 소개하는 것이 어쩐지 미쩍지근 했다. 여자친구라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친구는 더더욱 아니었다. 걸어갈 때 은근히 스치는 손이 뻔히 느껴지고 팔과 어깨가 닿게 나란히 앉아있으면서도 손을 잡지 않았다. 원래의 나였다면 먼저 손을 덥석 잡고도 남았겠지만 그와의 관계에서는 왠지 내가 먼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조심하고 들리는 것 같은데 모르는 척하는 그의 무심함을 원망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모르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니 너무 얌전을 떨었던 걸까. 예전처럼 그에게 까불거릴 수가 없었다. 둘만 있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런 갑갑함이 쌓이고 쌓여 폭발해 버렸다.
그와 며칠을 함께 보냈지만 얌전을 떠느라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했던 터라 잠깐 떨어지는 시간이 생기자마자 당시 제일 친했던 친구와 만나 한 잔 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이부었다. 마셨다는 표현으로 모자란 것 같다. 술을 말 그대로 위장에 들이부었다. 대학교 시절 나는 그야말로 술고래이자 주사가 아주 나빴다. 내 대표적인 주사 중에 하나가 취하면 갑자기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에게 싫다고 내뱉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내 주사인 줄 도 잘 몰랐다.
내가 너무 취한 것 같자 내 친구는 곧 사귈 것 같은 예비 남자친구인 J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블랙아웃이었던 나는 친구가 그에게 전화를 거는 줄도 몰랐다. 그저 맛있다고 감자탕 국물을 드링킹 하면서 소주 한 병 더 마시자고 우겨대고 있던 그때 J 가 나타났다. 그와는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까지 취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지금부터는 정말 어렴풋한 기억이다.
그가 나타났고 너무 취해 보이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데려다주겠다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아마도) 너무 놀라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마음에 집에 가지 않겠다고 우겨댔다. 그리고 주특기인 주사를 발휘하여 "나 너 싫다고! 저리 가라고!!"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그를 피해 도망가겠다고 막 뛰어가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는 날 보며 깜짝 놀라 그는 내 팔을 잡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저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잡은 팔을 확 뿌리치는 순간 그 반동으로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하필이면 가로수 앞이었고 가로수를 지면에 고정시키느라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플라스틱이 눈 옆을 스치며 박았다.
그때부터는 더 가관이었다. 나는 "너무 아파, 너무 아파 엉엉엉 너무 아파."를 연발하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했던 그는 일단 나를 감자탕집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나를 보고 친구가 기겁을 했다. 지금 같으면 바로 구급차라도 불러야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왠지 구급차는 죽기 직전의 사람들만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친구와 J는 당황하며 식당용 물수건으로 내 피를 닦고 지혈해 주었다. 다행히 피는 금방 그쳤고 겉으로 보이는 큰 상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겨우 진정된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눈을 부딪히면서 너무 아파서 술이 확 깨버린 터라 어렴풋이라도 이 모든 게 기억이 났다.
다음날 아침 집에서 눈을 떴을 때 통증보다 더 큰 수치심이 찾아왔다. 이불은 벌써 천장에 10번도 넘게 닿았다 내려온 뒤였다. 거울을 보니 눈이 퉁퉁 붓고 오색찬란한 색상으로 멍이 들어있었다. 급하게 병원부터 가보니 다행히 겉에만 상처가 생겼지만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고 몇 미리만 잘못 찍혔어도 실명할 뻔했다고 정말 위험했던 거라면서 단단히 주의를 들었다. 그냥 넘어졌다고 말씀드렸지만 입에서 풀풀 나는 술냄새와 아침 문 열자마자 들이닥치다시피 병원을 찾은 나를 보고 의사 선생님은 가히 짐작하신 듯했다. 당분간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거즈와 안대를 하고 다녀야 했다. 후크 선장이 따로 없었다.
다음 현실.
핸드폰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에게 괜찮다고 연락을 해주어야 하는데 문자 하나 보내는 데 겁부터 났다.
'아.. 내가 다 망쳐버렸다. 도대체 그 꼴을 보고 어떤 남자가 나를 좋아하겠냐고. 10년 같이 살던 남편도 도망갈 꼴을 보였는데. 게다가 이 멍든 눈은 또 어떻게 보여주냐고. 잠수가 답인가. '
괜찮다는 문자에 대한 답장이 그만 보자 혹은 실망했다는 것일까 봐 너무 두려웠다. 사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었지만 이 관계가 끝이 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저.. 기 나 괜찮아. 병원에서도 괜찮대.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술을 오랜만에 마셔서 과했나 봐."
"아! 걱정 많이 했어. 진짜 괜찮대? 많이 아파? 지금 너네 동네로 갈게. 잠깐 보자."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나 정말 괜찮아. 안 와도 돼. 휴가 나와서 하루가 아쉬울 텐데 오지 마."
"아냐. 어차피 오늘 만나기로 했던 날이어서 낮엔 다른 일정도 없어. 갈게!"
"알겠어. 그럼 준비하고 출발할 때 연락해."
그의 집에서 우리집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이 좀 넘는 거리였다. 우리 동네까지 온다고 한 건 분명 그의 배려였을 텐데도 당시 나의 혼란스러운 머리로는 직접 얼굴 보고 차려고 그러나 싶어 고마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찌어찌 상처가 물에 닿지 않게 머리를 감고 눈곱을 떼고서는 그를 만나러 나갔다. 모든 것을 각오한 상태였다. 그러나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 이게 뭐야. 눈이 왜 이래. 괜찮다며? 아니 근데 웃으면 안 되는데 너무 웃겨. 이 안대는 뭐야?"
"아.. 안구는 괜찮은데 부딪혀서 엄청 멍들었어. 너 그거 알아? 영화나 드라마에서 멍 파랗고 검게 나오는 거 다 거짓말이다. 멍은 무지개색이야. 볼래?"
"아냐. 괜찮아. 많이 아파? 어떻게 해. 내가 좀 더 잘 잡았어야 하는데... 네가 너무 코뿔소처럼 돌진해 가지고 내가 놓쳤어."
"뭐? 코뿔소?? 어이없네. 아니다. 근데 아무튼 100번 내가 잘못했어. 코뿔소.. 그래 코뿔소다. 내가."
그의 놀림이 나의 긴장을 사르르 녹였다. 또 눈물이 났다. 우리 사이가 그대로인 것만 같아서.
"야.. 너 나한테 정 떨어졌겠다."
"아? 좀 놀라긴 했는데 너 많이 다친 거 아니라서 다행이야. 근데 네가 나 싫어한다고 하던데?"
"내가 그랬다고? 아닌데.. 나 진짜 너 좋아하는데."
"아냐. 네가 진짜 나 싫어해서 도망가는 거 같아서 나 좀 충격받았어. 취중진담이라잖아."
"그거 다 개소리야. 말이 되냐.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해. 이렇게 눈탱이방탱이 되고서도 기어 나온 거 보면 모르냐? 휴... 난 네가 어제 그 꼴 보고 나 싫어하게 됐을까 봐 그게 걱정인데."
"헤헤. 그럼 너 나 좋아해?"
"응. 좋아해. 엄청 많이."
"....."
차일 줄 알고 나온 자리라 더 이상 숨길 말도 마음도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고백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고 장난치며 곁에 있어주는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카페에서 나와 다음 장소로 걸어가는 횡단보도에서였다. 갑자기..
그리고 스치기만 하던 내 손을 꼬옥 잡았다.
태어나서 제일 좋아하게 된 남자에게 차인다고 생각한 순간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눈탱이방탱이가 되어 안대를 낀 채로. 장난스러웠지만 진지한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그의 고백이 꿈같이 느껴졌다.
참으로 우리 다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