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해보는 장거리 연애
그가 전역하기 전 6개월은 짧지만 길었다.
제법 열심히 고무신 노릇을 했었더랬다. 사귀기 전에는 가끔 써서 보내주던 위문편지를 더 열렬히 자주 편지지 3-4장을 꼭꼭 채워서 적어 보냈고 선후임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커다란 라면박스를 구해다가 과자, 젤리, 초콜릿 등을 꽉 채워 보냈다. 생전 처음 군 면회도 가보았다. 고성인가 철원인가 기억이 가물하지만 그의 친구들과 강원도까지 함께 가서 하룻밤 자고 오기도 했다. 읍내에서 할 게 없어서 여기저기 헤매다가 그냥 바닷가로 가서 모래사장에 하염없이 앉아있다가 왔지만 그때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설레고 행복했다.
선임이 된 그는 자주 전화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거의 매일 통화를 하는데도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고 심장이 아팠다. 실제로 아팠다. 막 콕콕 찌르고 조여드는 것 같았는데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가 전화가 끊어지면 한참을 꺼이꺼이 울곤 했다.
'아.. 보고 싶다. 왜 못 보냐고!! 보고 싶다고!!'
그 6개월도 그렇게 못 참고 보고 싶어 죽겠다고 힘들어했던 나인데... 이제 막 전역해서 앞으로는 핑크빛 캠퍼스 라이프만 남아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중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내 대학시절이었던 2000년 대 초반은 한참 차이나붐이 불던 시기여서 주변 동기들도 영어나 일본어를 제치고 중국어를 공부하는 게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돈 내고 유학도 가는 판국에 일자리 제안이 덜컥 들어왔으니 내가 들어도 제법 좋은 기회 같았다. 게다가 J는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재입학을 한 탓에 학기가 많이 늦어지고 있어서 조금 초조해하는 면이 있었다. 친구들의 취업소식이 슬슬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본인은 아직도 1학년이니 해외 경험과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구미가 당길 만했다.
내 입장은... 정말 지옥이었다. 말릴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누구인가. 그렇게 J를 좋아하면서도 안 좋아한다고 몇 년을 친구인 척을 하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많은 경험을 해보는 거라면서 이곳저곳 그를 끌고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강조하던 쿨한 척의 대명사 '쿨병 장선생'이 아니던가. 그런 내가 갑자기 나는 장거리 연애는 싫다고 보고 싶어서 못 견딘다고 징징대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사실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내 손으로 바리바리 짐까지 싸주면서 또 한 번 쿨한 척 그를 보내게 되었다.
요즈음 같으면 국제 연애나 장거리 연애도 할 만할 것 같다. 매일 영상통화로 실시간으로 얼굴도 볼 수 있고 각종 SNS 등으로 소식도 쉽게 알 수 있고 하늘길도 활짝 열려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대학생이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엔 일단 국제전화는 무조건 '국제전화카드'를 사서 돈을 충전한 다음 공중전화로 걸어야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말하면 '스마트폰'이 아직 없었던 시기인 것이다.
당연히 전화도 그가 걸어야만 받을 수 있어서 늘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때그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넘칠 때는 '싸이월드 커플일기장'을 이용해서 서로 편지를 쓰고 혹은 이메일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그나마 그 학교 홈페이지에 학부모들을 위해 활동사진을 업로드해주었는데 그 게시판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들락날락했다.
이메일에 가끔 첨부해 주는 사진이 아니면 얼굴도 전혀 볼 수 없었고 처음 가자마자 학교일과에 따라 업무에 적응해야 됐던 그는 자주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마저도 뒤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나만 혼자 계속 메일을 보내고 글을 남기고 그러다가 보고 싶어서 울고 너무 우울하면 나가서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취해서 또 울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건 군대보다 더 최악이었다. 강원도는 야간버스라도 있지 중국은 가고 싶다고 막 갈 수도 없는 나라였다. 남의 나라 가서 고생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보고 싶다고 마냥 징징댈 수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그가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다가 보면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가 재밌다고 오길 잘했다고 이야기할 때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는데 한 번씩 힘들고 짜증 난다면서 괜히 왔다고 할 때는 속에서 열불천불이 나곤 했다.
'아니!!! 누가 가랬냐고!!! 여기 내 옆에서 같이 학교 다니면서 토익학원 다니고 영어공부 같이 준비해도 되는데 거길 가서 왜 그 고생을 하고 게다가 내 마음까지 이렇게 개고생을 시키냐고!'
알겠지만 속으로만 그랬다. 나까지 뭐라고 하면 마음 약한 그가 더 힘들어질까 봐 늘 밝은 척 응원의 말만 건네던 나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래도 최대한 자주 전화를 하며 나와의 통화가 유일한 낙이라고 말하던 그의 전화가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커플다이어리'에도 내 글만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일정이 바쁘고 피곤해서라고 했다.
특히 그가 쉬는 날인 특정요일이 되면 더더욱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자꾸 솟아오르는 불편한 감정들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축제 기간이 돌아왔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3학년부터는 올 A+ 가 목표였던 나는 단 한 번의 결석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듣고 있던 모든 과목의 교수님들께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교수님, 지금 제 남자친구가 중국에 있습니다. 요즘 수업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그 친구가 보고 싶어서 제가 밤을 지새웠기 때문일 겁니다. 먼저 심심한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교수님... 제가 정말 그 남자친구를 사랑하는데 아무래도 요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정말 천 번 만 번을 고민한 끝에 이 축제 기간을 빌어 저는 베이징에 가보려고 합니다. 축제기간에 휴강을 해주시는 너그러운 교수님이신 걸 익히 알고 있지만 혹시 몰라 저의 부재를 미리 신고합니다. 저는 저의 사랑을 지키러 갑니다. 출석 처리까지는 안 되겠지만 부디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어 제가 결석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성심성의껏 이행하겠습니다. 미련한 제자의 사랑을 응원해 주시리라 믿으며...... 블라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