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만리장성 쌓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베이징 여행은 즐거웠다! 어이없게도...
J에게는 나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혀 말하지 않았어서 내가 베이징에 갈 거라고 말하자 해맑게 좋아했다. 역시 너는 실행력이 대단하다고 어떻게 학기 중에 올 생각을 하냐며 감동받은 듯했다. 갑자기 연락도 잘됐다. 내가 곧 갈 거라고 생각하고 들떠 계획을 짜는 그의 모습에 스르르 마음이 풀려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가려고 결심했던 이유를 망각하고 있었다.
"나만 믿어! 내가 완벽한 코스를 짜둘게."
그동안 함께 했던 여행이나 데이트코스는 대부분 내가 알아본 적이 많았어서 그의 계획하에 즐기게 될 베이징 여행이 무척 기대가 되었다. 그가 리드하는 모습이 얼마나 든든할 것 인가!
교수님들의 긍정적인 응답도 받았고 중국 관광비자도 받았고 열심히 계획 짜고 있는 현지 생활 3개월 차인 남자친구도 있겠다 거칠 것이 없었다.
드디어 베이징으로 출발!!!
공항에 마중 나온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래 내가 예민했던 거야...
그는 완벽한 코스를 짜두었다고 했다. 심지어 호텔 예약까지 본인이 담당했다. 그런데 호텔 체크인부터 순탄치 않았다. 나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평소에 들지도 않는 서류가방을 어디서 사 왔나 보다. 아마도 그 유명한 '짝퉁시장'에서 사 온 것 같았다. 실제로 멋있긴 했다.
위풍당당하게 체크인을 하려는 순간 가방이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에 비밀번호를 걸어둔 것 같았는데 아무리 번호를 돌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여권, 지갑 모든 게 그 안에 들어있었는데 예약자 성명 또한 J의 이름이어서 내 여권을 들이밀어봤자 그의 여권 없이는 체크인이 불가능했다. 그의 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다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다독이며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조금 걱정되기도 한 게 빨개진 얼굴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꼭 남의 가방 훔쳐와서 내용물을 꺼내려는 모습 같았다. 혹시 호텔직원들이 오해하고 공안이라도 부를까 싶어 침착한 미소를 유지하며 그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것이 내가 맡은 역할이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중대 결심을 했다. 새로 산 가방을 자르기로 한 것이다. 프런트 데스크에 가위가 있냐고 묻자 그들의 표정이 더욱더 의심스러움으로 바뀌었으나 손짓발짓으로 무고함을 주장하자 빌려주긴 했다. 우리는 조용히 호텔 로비 밖으로 나와 서류가방을 무참히 잘라(찢어) 냈다.
그리고 다신 꼴도 보기 싫다면서 바로 쓰레기통에 가방을 처박았다. 한 시간여만에 겨우 했던 체크인을 시작으로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처음 공항에서 호텔까지 이용했던 택시 안에서 당당하게 중국어로 기사님께 이야기하던 그의 마법의 세 단어는 '쿼이쿼이' '쩔리쩔리' '쉐삐(사이다)'였다. 중국어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는 여행 내내 그 세 단어로만 이야기하는데도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을 보고 그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발마사지를 받으러 가서 마사지사가 이런저런 말을 좀 길게 건네자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린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어 왜 이렇게 잘하냐고 언어천재 아니냐고 존경의 눈빛을 한껏 보내기도 했다.
왕푸징과 짝퉁시장, 호수 근처에 카페거리, 왕징에서 한식당에 가서 사주었던 소고기 그리고 만리장성.
이것이 나의 베이징의 기억이다. 다녀온 지 20년이 다 되어가니 어렴풋이 장면들만 떠오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교과서에서만 보던 만리장성에 직접 올라본 것은 인생에 손꼽을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끝도 없이 이어져있는 긴 성벽 위를 걸으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이건 최근에 기억 소환을 위해 J와 잠시 대화하던 중에 그가 꼭 넣어달라고 한 박력 있다는 에피소드인데...
만리장성 앞에서 파는 양꼬치를 사 먹으려고 하는데 현지인한테는 '10원'에 파는 걸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아차리고 '20원'으로 두 배 바가지를 씌우려는 걸 J가 알아듣고는 '니 뿌하오(너 나쁘다!)'라고 외쳐서 현지인 가격으로 사 먹었다고 한다. 박력 있는 멋있는 모습이니 꼭 적어달라고 하던데.. 기억에 전혀 없는 걸 보니... 어쨌든 그런 성공적인 에피소드도 있었다.
여행 내내 그는 다정했다. 어설프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호텔에서 지냈고 그의 학교나 숙소에 가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현지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볼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흔적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덕분에 처음으로 중국에 가 볼 수 있게 되어 고마운 마음만 들었다. 어느새 나의 머릿속에 내가 베이징까지 와야 했던 목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증거를 잡으려고 갔다기보다는 그와 얼굴을 보고 깊은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너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나는 이런 면이 힘들었고 그러니 좀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전화로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렇게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상대방의 표정이나 태도에서 많을 것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더더욱 직접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때도 지금도 중요한 이야기는 면대면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오랜 연애 법칙 중 하나이다.
장거리 커플이 그런 것 같다.
떨어져 있을 때는 연락에만 의존해야 하니 오해도 많이 쌓이고 말 한마디에도 심각해지고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만나는 순간 모든 게 해결되는. 그래서 연인은 같이 있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서로 눈빛과 음성,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만으로 둘 사이의 사소한 문제들은 정말 사소해지니까.
떨어져 있더라도 다음 만남에 대한 확실한 기약이 있거나 보고 싶을 때 보러 갈 수 있다는 확신 이런 게 있어야 관계가 유지가 된다. 베이징에 갔던 내 선택은 그런 면에서 아주 성공적이었고 굳이 확실치도 않은 심증으로 그를 닦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가 너무 많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즐거웠던 베이징 여행을 계기로 우리 사이는 다시 좋아졌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큰 다툼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장거리 연애까지 훌륭하게 극복한 우리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고 단단해졌다.
그러나 진실은 이랬다.
진실을 알게 된 시점은 심지어 헤어지고 나서였다. 헤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 어느 날 안부 겸 통화를 하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 우리 사귀는 동안 바람 1번 피웠었잖아!'라고 내가 이야기하니까 '아닌데? 2번인데?'라고 그가 대답했다.
양심고백이라고 했다.
"2번???"
"응, 나 중국 갔을 때 있잖아. 깊은 사이는 아니었는데 엄청 예쁜 애가 나 좋아했었어. 나 수요일마다 쉬었잖아. 그때마다 XX형(중국 같이 가자고 꼬드긴 형)이 밖에서 저녁 사주고 클럽 갔었거든.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또 사회생활이니까 따라갔었는데 갈 때마다 거의 연예인 대접을 받는 거야. 오빠 인기 알지?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자제했었다 엄청. 근데 형 때문에 합석했던 자리에서 중국 여자 하나가 너무 예쁜 거야. 거부하기엔 너무너무 예뻤어. 그래서 그냥 섹스만 안 하면 된다는 생각에 밥도 먹고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랬다. 다시 말하지만 잠은 안 잤어.(말이냐 방귀냐!) 너 베이징 온다고 해서 뜸해지고 이래저래 자연스럽게 정리됐었는데 그때 너 갑자기 온다고 해서 괜히 뜨끔했잖아. 너 몰랐지?"
나 몰랐나? 아니 알았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정황만 몰랐을 뿐이다. 심증은 있었지만 그걸 캐내서 상처받고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고 끝낼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진실보다는 내 옆에 있는 그였다. 마음이 썩어가는 데도 눈과 귀를 막고 내가 열심히 사랑하면 그냥 모든 게 다 괜찮아질 줄만 알았던...
그리고 베이징은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도시가 되어버렸다.
행복했고 잔인했던 나의 베이징 여행. 짜이찌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