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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Mar 19. 2024

내 인생의 가장 추웠던 겨울

갑자기 찾아온 이별

 내가 갔던 캘거리는 아주 추운 곳이었다.


 사전 조사를 할 때도 북극 바로 아래라 겨울이 길고 춥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난생처음 겪어보는 영하 25도-30도 이런 기온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이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고 맨 살 어느 한 곳도 노출되지 않게 꽁꽁 싸맨 후 눈만 빼꼼 내놓고 다녀도 속눈썹이 바로 얼어붙었다. 농담으로 노상방뇨를 하면 오줌이 바로 얼어붙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현지 친구가 그렇다고 했다. (차마 직접 해보진 못했다.) 눈이 허리까지 쌓이는 일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얗고 차가운 회색 도시.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추수감사절에 겹쳐진 아주 긴 휴가기간이었다. 미주 문화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그 시기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고 덕분에 난 도착하자마자 모든 상점과 슈퍼, 공공기관이 닫혀있어 아무런 생필품을 사지 못하고 일처리도 하지 못한 채 고립당했다. 그나마 집을 미리 알아보고 간 덕에 지낼 공간은 있어 다행이었다. 수돗물을 마셔도 된다고 해서 수돗물과 몇 개 싸갔던 한국 라면 등을 아껴먹으며 4일을 버텼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고립되는 경험을 하다 보니 그래도 몇 달 선배로 먼저 가 있던 J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아주 커졌다. 사실상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J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의 변화가 어색하면서도 반갑게 느껴졌다. 주야장천 독립적인 삶만 고집하던 나였는데 의지하는 기분이란 게 나쁘지 않았다.


 어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금방 친구들이 생겼다. 한국인, 일본인, 스페인이나 남미 쪽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한국인들보다는 일본친구들을 사귀는 게 한마디라도 영어를 사용하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일본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었기 때문에 간단한 회화나 알아듣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일본친구들이 어느 순간 일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친구집에 놀러 가서 매일 술을 마시며 일본 공포영화를 시청하는 루틴이 생겼다. 영어보다 일본어가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핼러윈 행사도 하고 각종 방과 후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친구들이 점점 많아졌다.


 처음 구한 집이 좀 외곽이라 학교를 다니기도 일을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서 학교 커뮤니티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시내 쪽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모아간 돈이 많진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한국인 여자 하나와 룸 하나를 셰어 하게 되었다. 일자리도 비교적 빨리 쉽게 구하게 되었다. '모모야마'라는 초밥집 서빙이었다. 사장님은 한국인이었는데 일본에서 직접 초밥을 배워오셔서 일본어가 유창하고 일할 때도 주로 일본어와 영어를 사용하셨다. 외모 또한 일본인 같아서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가 일본인인 줄 알고 왔다. 홀 매니저 언니는 홍콩 사람이었는데 일을 진짜 끝내주게 잘했다. 나름 지역의 맛집이라 매일 웨이팅이 길었었는데 그 언니의 빠른 일처리 속도와 센스 있는 홀 운영으로 그 많은 손님들이 다 만족하면서 돌아갔다. 영어가 늘었다기보다는 눈치와 센스가 늘었고 끼니 걱정이 없어졌다. 사장님이 매일 남는 재료로 마끼나 초밥, 롤 등을 도시락으로 싸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친구들은 늘 나의 퇴근만을 기다렸다.


 그렇다. 나는 그 회색도시에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다.

한 두 달 만에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일자리도 생겼고 자꾸만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남의 문화권에서의 생활이 정말 딱 내 취향이었다. 하루하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매일매일이 나의 결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 짜릿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J와 공유하고 싶었다.


"있잖아. 오늘 하루카가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어디서 배웠는지 '언니, 나 쏘맥 타주세요.' 이러더라. 웃겨 죽는 줄 알았어. 아! 그리고 나 오늘 리사(홍콩 홀 매니저)한테 팁 많이 받았다고 칭찬받았잖아. 그러면서 나한테 10 달러 더 챙겨줬어. 완전 신남. 이번 주말에는 캘거리 타워 올라가 보기로 했는데 난 너 왔을 때 같이 가고 싶은데 애들이 하도 가자고 해서... 어떻게 하지? 블라블라 어쩌고저쩌고 쫑알쫑알.."


"아, 그래? 웃긴다. 잘했네. 가봐."


"넌 뭐 했어? 오늘 어땠어?"


"난 뭐 똑같았어. 별일 없었어. 잘 지냈고."


 내가 기대하는 리액션이 아닐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루 일과를 잘 마치고 그와 통화하는 게 내 하루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자 큰 낙이었다. 내 일상은 엄청 버라이어티 했지만 그는 나에 비해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일을 할 수 없었고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술도 안 마시고 크게 남들과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당시 살고 있던 홈스테이 집은 환경은 나쁘지 않았으나 주인 가족이 살고 있어 늘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래서 내 이야기들이 공감이 안 됐던 걸까. 아니면 지겹고 귀찮고 듣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내가 너무 그에게 의지하려고 해서 그런 걸까. 아직도 정확히 그때의 이별의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 그의 전화가 뜸해지고 목소리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기 위해 내가 예매했던 밴쿠버행 비행기가 뜨기 2주 전... 그가 갑자기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왜?"

"몰라. 그냥."


아주 일방적이었고 심지어 불친절한 이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는 그저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고만 생각했고 그가 전화를 잘 받지 않는 것이 바빠서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같이 방을 쓰는 친구에게 들키기 싫어서 화장실에서 숨을 죽여 입을 막고 울고 또 울었다.


 술이 필요해서 '리쿼스토어'까지 맨발 차림으로 뛰어가기도 했다.(영하 30도였고 동상에 걸렸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술에 절어 몇 일째 학교에 잘 가지 못하자 친구들이 찾아왔고 내 이별 위로 파티라며 또다시 술자리를 벌였다. 나는 내 인생의 이유를 잃었는데 그것이 '술파티'의 하나의 핑계가 되는 장면을 허망하게 지켜보았다.


조금 정신이 들고 나자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끝낼 순 없어. 그래, 헤어진다고 치더라도 이유는 들어보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얼굴은 보고 끝내도 끝내자. 그게 내 방식이니까.'


 크리스마스를 위해 끊어두었던 비행기를 취소하지 않았다.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 나 밴쿠버 갈 거야.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이별여행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헤어지더라도 얼굴은 보고 헤어지자.'


12월의 어느 날, 그렇게 참담한 마음을 안고 밴쿠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해 겨울은 그렇게 (드럽게)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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