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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Feb 07. 2020

아이의 걱정 상자

만 7세 우리 아드님은 하굣길에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떠든다.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우리 집까지 가는 길에 주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브리핑하는데, 보통 나는 슬렁슬렁 듣고 가끔 맞장구를 쳐준다.


엊그제는 교실에 걱정 상자(Worry Box)가 생겼다고 했다. 걱정거리를 종이에 적어 걱정 상자에 집어넣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좋은 생각이라 여겼지만 집에 오는 동안 아이에게 기가 빨려서인지 그렇구나 하면서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날 밤 아이가 잘 준비를 거의 다 마쳐가는 와중에 걱정 상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미 잘 시간이 다 되어가 늦었으니 내일 만들자고 하자 아이가 울면서 투정을 부리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부랴부랴 걱정 상자의 주재료인 상자를 찾았고, 마침 시리얼이 조금 남은 시리얼 상자를 비워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엉성하게 테이프로 붙여 걱정 상자 입구를 완성하고 걱정 한 가지를 적어 걱정 상자에 집어넣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도 아이는 걱정 상자에 집착을 하더니 상자를 대충 더 꾸몄다. 그리고 다른 걱정 한 가지를 더 집어넣었다. 학교에서 하는 걸 집에서 하니깐 재미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이가 학교에다가 말하기 싫은 걱정거리가 있었던 건지 아이의 걱정이 쌓여가는 걱정 상자는 계속해서 부지런히 자기 몫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은근히 아이가 걱정도 되고 궁금해서 아들에게 걱정 상자에 대해 다시 물어보았다. 아들은 걱정 상자에 걱정을 적어 넣으면 걱정 몬스터가 자신의 걱정을 다 먹어치 걱정이 사라질 거라고 했다. 원래 걱정 상자에 들어있는 걱정을 남이 보면 안 되는데, 나는 아들의 걱정거리가 궁금하여 아이가 적어 넣은 걱정을 봐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아이가 나에게 자신의 걱정거리를 오픈해주어 나는 아이의 걱정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의 걱정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들 이어서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현재까지 두 개의 아이의 걱정 중에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학교에 지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 지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항상 빠듯하게 교문에 도착했었다.  

아들은 보통 아침에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느리 적 거리며 학교 갈 준비를 했다. 내가 아침부터 화내기 싫어 좋게 얘기를 해도 아이는 혼자 여유를 부렸다. 그래서 나에게는 조급만 가득 안기는 아이의 등교 시간 그리 상쾌하 않았다.

그런데 약간 모범생(남에게 꾸중을 듣거나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함)에 가까운 우리 아이가 말은 안 했지만 본인도 지각할까 봐 늘 불안했었나 보다.

(아니 그럼 등교 준비할 때 엉덩이 춤추거나 농담하고 노래 부르느라 시간을 보내지 말았어야지!)     

아이가 아침에 즐겁고 여유 있게 등교할 수 있게 내가 더 도와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아이의 그 걱정이 크게 신경 쓰 않았다.   

 

다음날인 오늘 웬일인지 아들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고 준비도 빨리해 이른 시각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이가 집에서 아침 먹다 블록으로 기둥 네 개를 만들고 잠시 산만하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 교문이 열리기도 십분 전에 학교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이는 우리가 오늘 학교에 일찍 온 기록을 세운 것이 모두 다 걱정 상자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걱정 상자에 지각에 대한 걱정을 버렸더니 걱정이 정말 해결되었다며 기뻐했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 보면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획을 메모하면 그 일이 이루어질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고 했다.

아이가 걱정 상자에 걱정을 메모하면서 걱정을 인지하고 자기도 모르게 해결책을 찾은 것인지 어쨌든 오늘 아들의 작은 걱정 하나가 해결되었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크고 작은 걱정을 마주할 기회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때로는 부모인 우리나 누군가가 도움을 주겠지만 결국에 아이의 걱정은 스스로의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아이가 오늘의 경험을 통해 걱정을 다루는 법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면서 해결할 수 없는 걱정들 많겠지만, 아이가 걱정 상자를 이용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걱정을 끌어안지 말고 밖으로 내보내 버리려는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오늘도 이렇게 아이를 통해 삶에 대한 또 한 가지 지혜를 배우게 된다. (아들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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