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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Sep 11. 2020

'잊고 싶지 않다'는 말의 동의어

요즘 한국에 있는 친구들 생각이 자주 났다.

꿈에서 친구가 나타나거나, 아침에 일어날 때쯤 어떤 친구가 문득 떠오르거나 했다. 여름마다 한국을 갔었는데, 이번엔 코로나로 고향에 가지 못해 그리움이 커져서 그런가 보다. 가끔 하늘 위로 지나가는 여객기를 보면 마음이 울컥할 때가 있다. 코로나로 인해 런던과 인천을 오가는 비행기 편수도 줄었고, 그 때문에 한국에서 보낸 우편물의 배달은 평상시보다 지연되고 있다.

왠지 고향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코로나로 모든 게 기약이 없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남편이 어제 토니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나와 아이도 장례식에 따라나섰을 것이다.   

시누이의 시아버지이신 토니 할아버지는 정이 많고, 내게는 살가운 분이셨다. 부인이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토니 할아버지는 시누이의 집에서 모일 때 함께 초대되기도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가끔 토니 할아버지를 지만, 시부모님보다도 나를 편하게 잘 대해주셨다. 토니 할아버지를 마지막에 을 때가 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이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우리 부모님의 안부를 궁금해하셨다. 아버지 상태가 안 좋다고 말씀드렸더니, 토니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내게 유감을 표하셨다.

96세의 토니 할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노쇠현상으로 귀도 잘 안 들리고 눈도 잘 안보였다. 할아버지의 눈은 사물의 형체를 뿌옇게 해 놔서 할아버지가 사물을 식별하시려면 눈앞에 가까이 갖다 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이맥 컴퓨터로 소소한 창작 활동을 해오셨다. 눈이 잘 안 보여서 컴퓨터 스크린에 이미지를 최대한 확대해서 작업을 하셨다. 토니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기념일마다 컴퓨터로 예쁘게 만든 카드를 우편으로 보내주시곤 했다. 카드에 담긴 할아버지의 작품에는 따뜻한 사랑이 묻어났다. 2차 대전 참전 후에 미대에 진학하시고, BBC에서도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셔서 그런지 예술을 손에 놓지 않으셨다. 나는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해도 항상 뭔가 창작하시는 토니 할아버지를 보며,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우리 집 우편함으로 토니 할아버지의 정성 어린 카드를 만나볼 수 없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서니 매년 누군가의 부고를 듣게 다. 이십 대 때는 전혀 생각도 안 해봤던 '죽음'과 '나이 듦'이라는 삶의 주제는 사십 대가 되니 일상으로 더 가까이 걸어 들어오고 있다. 이건 내가 문을 닫거나 열쇠로 잠가 막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기에, 이제는 나도 점점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슬퍼하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이 좋은 건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다.   

                          

2017년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나니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나는 나대로 이곳에서의 삶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몇몇 친구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있는 이들과 연락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전화번호를 새로 하고 카카오톡의 비밀번호를 어버려 재가입하다 보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친구들은 내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로 사람이 그리워졌는지 그간 연락을 안 했던 친구들 생각이 났다. 한 친구는 대학 신입생 때부터 내 흑역사와 연애사 등 과거사를 잘 알고 있는 동아리 친구였고, 한 친구는 남편이 한국 생활을 적응할 때 많이 도와줬던 언니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는 아직까지도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락만 안 했을 뿐이지 막역한 사이였던지라, 다시 소통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에게서 "연락해줘서 고맙다"는 뜻밖의 인사를 받았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의 토양에 있던 작은 씨앗이 햇살을 받아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작은 꽃 한 두 송이가 갑자기 덩굴이 되어 내 마음을 한가득 채워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되고 싶어 한다.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보면,

 '누군가를 싶지 않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로 사람들 간의 왕래 많이 뜸해졌지만, 

중한 사람들을 다시 기억하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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