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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Jan 19. 2021

그림책이 움직인다

프랑스가 음식, 브라질은 축구로 유명하다면, 영국은 무엇으로 유명할까?

그건 바로 동화책이다.


이것은 해외에서 유명한 동화 그루팔로(The Gruffalo)의 저자이자, 현시대에 영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줄리아 도널드슨에 관한 BBC 다큐멘터리 <The Magical World of Julia Donaldson>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우리나라에서 미취학 아동들과 엄마들에게 친숙한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을 비롯해서 존 버닝햄, 헬렌 옥슨버리, 주디스 커 등이 영국 출신이다.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서로 손을 잡아 이야기를 완성한 책이다. 그림만 있는 그림책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림 자체가 시처럼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좀 더 범위를 확장해 초등학생 이상의 독자층에서는 J.K 롤링의 <해리포터>와 크레시다 코웰의 <드래곤 길들이기>, 로알드 달의 동화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로알드 달의 <마틸다> 같은 경우, 영국 웨스트엔드에서처럼 한국에서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이런 동화책들은 그림보다는 글이 더 주인공이라서 글밥이 아주 많고 책도 소설책만큼 두껍다.

영국은 영어 종주국으로써 자국의 동화책이 전 세계 출판시장에 접근하는데 보다 유리했고, 여기에 특유의 창조성이 더해져 국제적인 위상을 쌓아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영국 전역이 들뜨는 것 같다.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민족 대명절과 마찬가지다. 영국인들은 가족끼리 크리스마스 선물과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

크리스마스 식탁에 음식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으로 크리스마스 크래커가 있다. 크리스마스 크래커는 길이가 30cm 정도인 사탕 모양길쭉한 종이상자로, 두 사람이 양쪽 끝을 서로 잡아당겨 터트리 크리스마스 오락용품이라 할 수 있. '탁' 소리를 내며 찢어지는 크리스마스 크래커 안에는 종이 왕관, 시시껄렁한 크리스마스 농담이 적힌 종이 그리고 대게는 플라스틱 선물(싸구려 장난감)이 들어있다. 가족들은 종이 왕관을 쓰고, 포춘쿠키 쪽지보다는 조금 더 큰 종이에 적힌 유머 퀴즈를 맞추며 크리스마스의 디저트 코스와도 같은 시간을 보낸다.

크리스마스 크래커처럼 크리스마스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가 있다. 그것은 영국 공영 TV 채널에서 아이들에게 선물 보따리를 푸는 것이다. 바로 영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그림책을 TV 화면 위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다. 1982년 채널 4에서 제작해서 방영한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화 <스노우맨(Snowman)>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스노우맨>은 방영 이후 큰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크리스마스 애니메이션의 고전이 되었다. 이후 채널 4에서는 헬렌 옥슨버리의 <곰 사냥을 떠나자>, 주디스 커의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등 매번 다른 영국 작가의 그림책을 선정해 그림체와 색의 질감까지도 그대로 살려 애니메이션으로 부활시켰다. BBC에서는 주로 줄리아 도널드슨의 그림책을 크리스마스 특집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떤 그림책 이야기를 TV 화면에서 만나볼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게 궁금해하게 된다.


<어릿광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2020년 크리스마스이브, 채널 4에서는 퀀틴 블레이크의 그림책 <어릿광대(Clown)>를 선보였다. 퀀틴 블레이크는 <찰리의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 로알드 달의 저서 18편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잘 알려져있다. 잉크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 강한 선을 살린 일러스트레이션이 특징이다.

 <어릿광대>는 그가 만든 책으로 텍스트가 하나도 없는 데, 애니메이션의 제작사에서는 내레이션 대본을 쓰고 영화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를 해설자로 캐스팅했다. 영화 <해리포터>와 팀 버튼의 영화에 다수 출연한 연기파 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는 연기할 때 캐릭터의 심리적인 동기를 분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어릿광대>에서 어릿광대의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그녀의 내레이션은 너무나도 맛깔났다. 누군가 그녀처럼 책을 읽어준다면 재미없는 책도 흥미진진하게 느껴져 계속 읽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것 같다.

 <어릿광대>는 주인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진 인형, 어릿광대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릿광대는 쓰레기통을 빠져나와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쓰지만, 또다시 여러 손에 의해 버려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하지만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정에서 새 삶을 살게 된다. 어릿광대가 새 주인과 외출할 때, 그의 앞날을 축복하듯 리에 하얗게 눈이 내리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사랑 가득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상케했다.

희망적이고 따뜻한 내용의 <어릿광대> 애니메이션은 종이책 위에서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스케치북 종이 재질의 텍스처와 물감의 번짐도 최대한 그대로 살렸다. 제작자의 말에 따르면 페이지를 넘길 때의 효과도 의도했다고 한다. 여기에다가 헬레나 본햄 카터의 찰진 내레이션과 광대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배경 음악이 조화를 잘 이뤄 하나의 멋진 애니메이션으로 탄생됐다. TV에서 움직이던 그림책은 어른과 아이 모두를 황홀한 마법의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풋풋한 얼굴의 데이비드 보위가 눈 내리는 창이 있는 다락방에 등장한다. 그곳의 서랍장에서 눈사람 무늬가 있는 목도리를 꺼내 두르며, 어릴 때 자기가 만든 눈사람이 줬다고 말한다. 추억을 회상하는 이 장면은 <스노우맨> 애니메이션의 첫 장면으로 이어지는 도입부이다. 애니메이션이 전개되면, 데이비드 보위의 목도리가 그림 속 소년의 목도리와 똑같다는 걸 누구나 눈치채게 된다. 평소 무대 위에서 중성적이고 화려한 분장을 하던 글램 록의 대표 가수, 데이비드 보위가 노르딕 패턴 스웨터와 면바지의 단정한 차림을 하고, 어찌 보면 유치할 수도 있는 설정을 기꺼이 연기했다. 그처럼 특별한 날을 위해 체면을 잠시 내려놓 세계적인 스타들이 또 있다.

2019년에 방영된 주디스 커의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서 주인공 소피호랑이가 서로에게 익숙해지자, 뮤지컬 같은 상상의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낯익은 목소리의 스윙 즈가 흐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가수 로비 윌리암스이다. 그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자주 읽어주던 동화라<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의 주제가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림책이 그런 것처럼 그림책을 재현한 애니메이션에도 등장인물의 대사가 거의 없는데, 이 작품에서 소피의 아빠 역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애니메이션의 처음과 끝에만 잠깐 등장하는 조연이다. 그런데 이 역할을 요즘 할리우드에서 각광받고 있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았다.

유명인들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이렇게 선뜻 나서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어린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책이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림책은 영국인들 대부분에게 큰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라는 진수성찬에 꼭 올리고 싶은 음식이 된 것 같다. 그들이 그림책을 이렇게 아끼고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장황한 말 대신 얼굴 표정과 제스처만으로도 따뜻한 위로가 되는 그런 친구임을 알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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