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이 다른 세상
몇 년 전의 일이다. 나와 내 동생은 같은 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동생부부는 우리보다 아이를 일찍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를 보게 되었다. 내 동생의 딸이다. 우리 역시 아기를 가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터라 조카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실제로, 조카는 너무 귀여웠다. 내 동생의 얼굴이 조카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고 가끔은 내 얼굴도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사랑스러웠고 귀여웠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카를 내 자식보다 더 귀여워하면 어떡하지?
주변 육아 선배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만약에 내 자식을 낳았는데, 조카를 너무 귀여워했던 것만큼 못하거나 하면 어떡해요?"
"내 자식을 낳았을 때 느껴야 하는 감정을, 지금 조카에게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어떡해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이 질문들은 정말 무의미한 질문들임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 나름 진지했고 심각했다.
내가 물어본 사람들의 대부분의 대답을 예외 없이 동일했다.
"조카와 자식에 대한 감정은 차원이 달라"
"자식을 낳고 나면 조카는 생각도 안 날 수 있어"
"자식을 낳아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지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렇다. 내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예전에 가졌던 걱정이나 근심들은 정말 필요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조카에게 가졌던 감정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원이 다른 감정이라는 것에는 백번 동의하고 공감이 된다.
조카에게 나는 놀아주고 즐겁게 해주는 존재만 되면 된다. 이 이외의 것은 동생부부의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조카를 대할 때 그 부분만 집중하면 된다. 그래서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내 자식에게 나는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된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씻고 놀고 배우고 실랑이를 하다가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나는 해도에게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인 해도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가 예전에 가졌던 걱정거리는 온 데 간 데 없다. 그런 걱정을 했다는 기억조차 이제는 희미하다. 그만큼 나는 내 자식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은 신기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게, 조카와 내 자식 모두 귀여운 아기이지만 차원이 다른 감정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감정은 어떤 감정인지 설명조차 되지 않는다. 존재의 가치를 넘어 무안하고 절대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인 것 같다.
자식에 대한 아빠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본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프레임이 형성되어 있지만 나는 그 프레임에 주목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아내와 해도와 함께 교감하는 시간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공유되는 절대적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로 알게 되는 범위가 넓어지고 그 알게 됨의 폭은 결국 서로를 서로가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 고민이 생겼다.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에게 최근 한 달 동안은 24시간 하루종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내가 항상 생각했던 최상의 육아환경이었다. 하지만 곧 일터로 복귀하게 되면 아침에 자고 있는 해도를 보고 출근할 것이고 내가 퇴근하면 한두 시간 후면 해도는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해도는 하루 몇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는 것이 된다.
'육아휴직'이라는 단어가 불현듯 내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