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의 담당은
오래된 노트북 1이었답니다.
노트북 1은 이제 많은 기능이 떨어져서
여러 개의 자판이 안 눌러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답니다.
사용이 너무 불편해진 주인은
키보드를 하나 사는 걸로 결정한 거였죠.
내가 노트북 1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을 때
이 친구는 참 과묵한 성격을 갖고 있었어요.
한번 켜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도
짜증 한 번을 안 내고, 막상 켜지고 나면
멀쩡히 잘 돌아가니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더군요.
그렇지만 노트북 1이 좀 안타까운 것이
중요한 일에선 다 제외된 상태였어요.
어느 날에 갑자기 모든 작동을 멈추고
먹통이 되어버린 적이 있었던 노트북 1에게
주인이 더 이상 중요한 자료나 작업을 맡기지 않았거든요.
언제 또 먹통이 되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게
노트북 안을 텅텅 비워두고 있게 되었죠.
그래서 노트북 1은 내게 미안해했어요.
하필 그런 시기에 자기를 만나서
키보드인 내가 너무 할 일이 없게 만들었다면서
오히려 내 걱정을 해주는 속정이 깊은 친구였어요.
노트북 1의 생각지 못했던 자상함에
나는 너무 마음이 편하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론 정말 심심하기도 했죠.
내가 명색이 새로 구입한 키보드인데,
이 집에 와서 딱히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주인이 주로 사용하는 것은 노트북 2랍니다.
노트북 2는 노트북 1이 완전 먹통 상태였을 때
위기의식을 느껴 주인이 구입한 노트북이라고 하더군요.
주인은 자신이 시작한 학습과정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진 노트북 두 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노트북 1의 상태가 더 나빠지면
절대 안 된다고 판단했고,
노트북 1은 가능하면 작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노트북 2가 대부분의 일을 하고 있네요.
처음에 나는 노트북 1의 파트너였기에
노트북 2가 옆에 있든 말든 관심이 가질 않았어요.
어느 날에 주인이 그러더군요.
"몇 년이나 노트북 1에 손이 익숙해져 있어서
노트북 2의 자판이 너무 어색해."
그러면서 노트북 1과 함께 있는 나를 쏙 빼더니
노트북 2에다 연결해 버리지 뭐예요.
"어? 내 짝꿍은 노트북 1인데?"
나는 갑작스레 파트너가 바뀌며
노트북 2에게로 옮겨가게 된 것이 정말 싫었어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이렇게 갑자기 바꾸어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아세요?
막상 노트북 2와 얼떨결에 파트너가 되고 보니
아직 고장 난 적이 없는 노트북 2는 모든 게
빠릿빠릿해서 답답한 구석이라고는 없더라고요.
빨리 켜지고 빨리 꺼지는 것부터가 얼마나
시원시원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전원이 켜지고 꺼지는 기본적인 것부터가
이미 노트북 1과는 달랐어요.
그때부터 느려터진 노트북 2가 너무 답답해
보이기 시작했어요.
모든 주요 활동이 노트북 2에서 이루어지니까
당연히 나도 노트북 2와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함께 있으면 확실히 활기차고 신나더라고요.
사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런 거긴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거!
내 존재감을 팍팍 느낄 수 있는 그런 활동들!
노트북 2와 함께 있으면 내가 원하던 것들이
가능했어요.
노트북 1과의 만남에선 마음은 편했지만
심심하리만치 나의 존재감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주인은 오래된 기계가 언제 멈춰 설지 몰라서
조심조심 거의 사용을 안 했으니까요.
그러니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만약 노트북 2가 성격이라도 나빴다면
정이 안 갔을지도 모르는데,
이 친구는 기계가 팔팔해서 그런 건지
성격까지 밝고 좋지 뭐예요.
일도 빨리빨리 후딱 해결하고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노트북 2였어요.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였어요.
비교적 최근 기계라서 상태가 아주 좋았거든요.
거기다 결정적으로 좋았던 게 뭔지 아세요?
우리 키보드의 삶이라는 게,
사실 인간이 사용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말거든요.
그런데 노트북 2랑 연결된 후엔 주인이 나를
자주 잘 사용해 주더라고요.
내가 완전히 쓸모 있는 존재였어요.
나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였냐면요.
타타타타 자판 치는 소리도 듣기 좋다면서
워드 작업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도
나를 자주 사용해 주었다는 점이에요.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주인이 주로
마음을 차분히 할 때 쳤던 글자가
애국가였어요.
애국정신이 투철해서? 그런 거 절대 아니고
이유도 무지 단순해요.
애국가가 짧아서 반복해서 치기에 쉽고
규칙적인 자판소리를 듣고 있다 나면
마음까지 차분히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나 뭐라나.
키보드인 내가 그런 마음의 안정 효과까지
주인에게 주었다고 하니 절로 온몸이 으쓱해졌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에게 잘해주던 노트북 1이 있었음에도
노트북 2에게로 어느새 마음이 기울어버린 것이
잘못이었던 걸까요?
나에게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어요.
주인이 갑작스럽게 나를 노트북 2에서
뽑아버렸어요.
키보드인 나를 뽑아버리면 본체가 없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잖아요.
아니 왜? 도대체 왜?
나는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노트북 1의 파트너였던 나를
갑자기 노트북 2에게로 연결하더니,
노트북 2랑 쿵짝이 잘 맞아서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던 나를,
또 갑자기 바꾼 이유가 뭘까요.
영문도 모르고 왜 내가 강제로 뽑혀버렸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더 슬펐던 건 내가 노트북 2에서
강제로 분리되던 날에,
노트북 2의 숫자 키나 글자 키들이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를 향해 짓고 있는
표정이 있었어요.
"그것 참 쌤통이다"를 쑥덕이며
아주 고소해하는 그런 표정을 짓더라고요.
나는 너무 기가 막혔어요.
쟤들은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러는 걸까?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만 한가득이었는데
조금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 생각해 보니
그 녀석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노트북 1과 2는 서로의 경우가 달랐던 거였어요.
노트북 1은 워낙 오래된 데다 고장이 나 있는,
한마디로 기계적 결함이 있는 친구였어요.
내가 그 옆에서 키보드로서 돕는 건
아주 필요한 도움이라고 할 수 있었죠.
다른 녀석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지 못할 만큼요.
그렇지만 노트북 2는 자판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었죠.
엄연히 노트북에 자판이 있는데,
불청객인 내가 끼어든 거니까요.
노트북이 오래되어 망가진 것도 아닌데,
유선 키보드인 나 때문에 전용 자판이
전혀 사용되질 못했으니,
얼마나 내가 꼴 보기 싫었을까요.
그동안은 몰랐어요.
나의 즐거움과 나의 존재감만 생각하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어요.
그동안 나를 잘만 사용해 놓고
오늘 갑자기 내쳐지는 일을 당하고 보니
이제야 그들의 마음이 좀 이해가 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나는 두 대의 노트북 덕분에
두 가지의 다른 마음을 느껴볼 수 있는
감사한 경험을 했어요.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 보기도 하고,
너무 할 일이 많아진 나의 존재감에 뿌듯해보기도 했죠.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못했었네요.
너무 신나서 기쁨에 취해 있느라
타타타타 경쾌하게 키보드의 노래를 불러댔죠.
나만 즐거워하는 소리에 마음 상했을 이들이
꽤 많았겠구나 생각하니 미안해졌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 주인이 뭐라고 했냐면요.
"에이, 키보드를 좀 작은 걸로 샀어야 했나?
요즘엔 작고 예쁜 것도 많이 나오는데
나는 왜 굳이 책상 위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큰 걸로 사가지고 말이야. 아.. 불편해."
라고 하더라고요.
주인이 나를 노트북 2에서 빼버린
이유이기도 했어요.
책상 위가 좁아졌다는 이유가
당장의 큰 불편함으로 떠오른 것이었죠.
좋다고 잘 쓰고 있을 땐 언제고 말이에요.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변덕스러울 수 있단 걸
내가 미처 몰랐네요.
이제 나는 오래도록 필요한 존재일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하긴 변심한 주인에게 뭐라 하기에는
나도 별반 차이가 없네요.
노트북 1이 느리다고 답답해했었고,
노트북 2랑 파트너 되는 순간 1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보며 좋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두 노트북 사이를 오가며 상처나 피해를
주었겠구나 싶었어요.
며칠 전에는 구석에서 강제 휴식기를 갖고
있었던 내게, 주인이 다시 노트북 1과 나를
연결시켜 주더라고요.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
내가 이 집에 처음 오게 된 이유로 되돌아왔답니다.
주인이 노트북 두 대가 필요한 기간이 되어서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 1과 재회했어요.
어째 쑥스러운 마음이 드는 나와 달리,
노트북 1은 변함없이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어요.
"키보드야, 오랜만이야. 다시 보니까 좋네.
네가 노트북 2와 작업하면서 내는 소리는
정말로 경쾌하더라. 네가 무척 신나고
행복하구나를 소리만 들어도 느낄 수 있었어."
"미안해. 나만 너무 신났던 거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키보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거야.
하필 결함이 있는 나의 파트너가 되는 바람에
너를 너무 할 일이 없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늘 미안했던 건 나였는걸.
네가 노트북 2랑 있을 땐 너의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어서 행복해 보였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어. 이건 진심이야."
"너는 여전히 속이 깊구나.
그동안 나는 내 즐거움만 생각하느라
네 생각을 안 했는데도, 너는 내 행복을
빌어주고 있었구나. 너무 고맙다.
너는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나는 자꾸만 변덕을 부리는 주인이 미웠어.
자판을 칠 때 헛손질이라도 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런데 그건 노트북 1 네가 원하는 건 아니지?"
"응.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럴 줄 알았어. 너는 늘 그랬었지.
우리 힘 합쳐서 주인이 잘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자. 우리의 찰떡 호흡을 보여주자고!"
노트북 1의 진중한 마음과 다시 마주하니까
내 마음도 덩달아 뭉클해지더라고요.
노트북 1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노트북 1은 상대방의 변화에 따라
덩달아 휙휙 바뀌는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일관되게 지킬 줄 아는
멋진 친구라는 걸,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었던 날이었지요.
나는 이제부터라도 노트북 1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필요한 만큼 다 사용했다면서
다시 노트북 1과 나를 쑥 떼어내 버리는
야속한 주인입니다.
그냥 같이 좀 있게 해 줄 것이지.
너무하네요.
그래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주인 때문에
느낀 바가 많아요.
지금 나는, 주인 때문에 또 강제 휴식기에
접어들었지만 이젠 불안 초초하지는 않아요.
노트북 1과 만났을 때와 노트북 2를 만났을 때
나의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보니
이젠 내가 그들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노트북 1과 2가 각각 다른 방법으로 내게
그들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제 내가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먼저 달려가서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예요.
그때는 그들에게 딱 필요한 방법으로
센스 있는 키보드가 되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