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슬리퍼 240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나는 치수 240인 슬리퍼예요.

바닥이 아주 푹신푹신하고 단정한

검은색의 몸을 가졌어요.

현재 <다 팔아 마트> 잡화 코너에서

어떤 집으로 가게 될지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이 잡화 코너에는 내가 짝사랑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의 이름은 슬리퍼 260이랍니다.

그 애랑은 같은 공장 동기예요.


가장 흔한 검은색인 나와는 달리

슬리퍼 260은 되게 보기 좋은 회색 몸을 가졌어요.

공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첫눈에 반했어요.

나보다 몸길이도 길고 색깔도 예쁜 그 애가

그냥 좋았거든요.

늘 260의 옆에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내 소원이 이루어진 거예요.

우리 같이 <다 팔아 마트>로 배정을 받았거든요.

이동 중일 때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애의 옆에

놓이게 되었는데요.

얼마나 콩닥콩닥 가슴이 뛰던지 너무 떨려서

말 한마디도 못 시키겠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그 애 옆에 있기 바랐는데

정작 같은 차에서 옆자리에 타고도

말도 못 시키는 소심함이 너무 싫었어요.


나는 정말 용기를 쥐어짜서 겨우 260에게 말했어요.

"우리는 어떤 곳으로 가게 될까?

나는 지금 너무 떨려.(네 옆에 있어서)"


나의 "떨려"라는 말이 사실은

어디로 갈지 몰라서 떨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지금 네 옆에 있어서 떨린다는 말이었는데요.

아마 260은 절대 모를 거예요.

그런 내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걸 말이에요.


내 말을 듣고 그 애도 말했어요.

"그러게. 나도 너무 떨리네. 그래도 좋다.

동기인 너랑 같이 있어서."라고 하더군요.


260은 동기여서 좋다고 한 거지만 내게는

"좋다, 너랑 같이 있어서"라는 말로

크게 메아리처럼 울리면서 들렸어요.


덕분에 잠깐 동안 아주 많이 행복했답니다.

하마터면 너무 좋아서 "야호"라고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나는 260을 향해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어요.

"나도 네가 참 좋아"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마트에 도착했고,

260과 나는 같은 열에 놓이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뻤어요.

260은 내게 동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며

'슬리'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더라고요.

그 애가 슬리라고 불러줄 때마다 정말 기뻤답니다.


'퍼'라는 글자 하나만 떼었을 뿐인데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이름이 된 것처럼

너무나 기분이 좋았어요.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러주어서 우린 더

특별한 사이가 된 것만 같았어요.


나는 기회만 된다면 그 애한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어요.

260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에요.

그리고 나도 단 하나의 특별한 존재이고 싶었어요.


그런데요. 고백을 너무 하고 싶은데도

망설여지더라고요.

만약 우리가 다른 집으로 가게 된다면

영원히 만날 수가 없을 텐데,

고백만 하고 영원히 헤어지게 될까 봐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내게는 하나의 소원이 생겼어요.

내가 좋아하는 260과 늘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제발 우리 둘이 같은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매일매일 기도했어요. 만약에 슬리퍼 260과

같은 집으로 가게 된다면, 그땐 꾹꾹 눌러 참았던

이 마음을 꼭 고백하리라 다짐하곤 했답니다.


마트에 있는 동안 나는,

260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손님들이 우리들을 절대 마음에 안 들어하길

바라고 또 바라면서 지냈어요.

우리가 같은 집에 가지 못할 바에야

그 어떤 손님도 우릴 마음에 안 들어해야

이렇게라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마트 직원이 오더니 우리 슬리퍼들에게

가격표를 바꾸어 달았어요.

1+1 행사를 하는데, 크기에 상관없이

교차해서 살 수 있다면서 붙이더라고요.


나는 또 간절히 기도했어요.

제발 우리 둘이 함께 선택되어 같은 집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에요.


어느 날 오후에 한 손님이 다가와서

슬리퍼들을 만져보고 신어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나를 먼저 골랐어요.

발바닥이 푹신푹신한 것이 정말 편하다며

마음에 들어 했지요.

그리고 내 기도가 이뤄졌어요.

나와 함께 갈 슬리퍼로 260이 선택됐어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나의 짝사랑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어요.


만약 고백했다가 안 받아들여지면 어쩌냐고요?

괜찮아요. 그래도 같은 집에 살 수는 있으니까

260의 모습을 못 보고 살지는 않을 거잖아요.

보고 살 수 있으니 그게 어딥니까.


그 애와 나는 드디어 손님의 장바구니에

함께 담겼답니다.

난 너무 좋아서 260에게 말했어요.


"저기 있잖아. 나 너랑 같이 가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좋아.

음... 사실은 내가 너를 되게 좋아해.

처음에 공장에서 눈 마주친 순간부터

네가 좋았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서

고백하는 거 많이 망설였는데,

그래도 꼭 한 번은 말해주고 싶었어.

너를 좋아한다고."


하필 고백장소가 장바구니 안이라서

낭만과는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죠.

그런데 속이 후련한 것과는 별개로

그때부터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죠.

그때 갑자기 그 애가 막 웃기 시작했어요.


"슬리야! 그런 거였어?

나 되게 기분 좋다.

혼자서만 너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근데 너 참 바보구나?

내가 마트에서 다른 슬리퍼들에게

애칭 지어 부르는 거 들어본 적 있어?

나 너한테만 '슬리'라고 부른 건데 그걸 몰라주냐.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그런 거였어?

그럼 오늘부터 커플 슬리퍼 하는 거야?"


"우린 아무래도 운명인 거 같지 않니?

그렇게 많은 슬리퍼들 중에, 우리 둘을 딱

골라 담는 것 봐. 우린 커플 슬리퍼의 운명을

타고난 거야. 하하하.

우리 도착하면 잘 살아보자. 행복하게!"


260과 나는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고

커플 슬리퍼로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답니다.

핑크빛 미래가 펼쳐지고 마음껏 사랑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 기대했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은

우릴 다시 한번 신어보고 잘 샀다면서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를 들어서 현관 쪽에다 놓고,

260은 번쩍 집어 들어 베란다로 옮기지 뭐예요.


"어... 어... 이게 뭐야! 슬리야! 슬리야!!!"

그 애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커플 슬리퍼는

애당초 이 집주인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어요.

치수가 다른 슬리퍼를 산 이유도 단순했어요.

240은 주인이 근처에 나갈 때 신으려고 산 거고,

조금 큰 치수 260은 베란다 쪽에 소독이나

뭔가 고치러 방문하는 사람들이 신을 수 있게

마련한 거라고 하더군요.


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늘에야 서로의 마음을 드디어 확인했다고요.

이제야 짝사랑에서 벗어나서 아름다운

커플 슬리퍼의 미래를 꿈꾸었는데,

새로운 집에 오자마자 강제 이별이 웬 말입니까.


차라리 마트에 있었을 때가 좋았어요.

그땐 같은 열에 있어서 빼꼼 고개만 내밀면

260의 뒤통수라도 볼 수 있었단 말이에요.

지금은 베란다와 현관으로 거리가 너무 멀어져 버렸어요.


우린 졸지에 슬리퍼 계의 견우직녀가 된 것 같아요.

그러면 베란다와 현관 입구를 잇는 오작교는

도대체 누가 해주는 거냐고요.


나의 짝사랑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이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슬퍼서 눈물 나요.

왜 우리에게 이런 강제 이별의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같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만든

주인이 정말 미워요.

우리 제발 같이 붙어있게 해 주세요.



<에필로그>

매일 보지 못하는 아쉬움만 빼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식적인 날이 있어요.

바로 260과 나를 주인이 빨아주는 날!

우리는 주인이 솔로 밀어주는 목욕을 마치고

말갛고 깨끗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한답니다.

오랜만에 보면 260이 더 멋져 보여요.

우리는 베란다에서 따스한 햇살을 쬐면서

물기가 보송보송 마를 때까지 함께 보낼 수 있어요.

그간의 못다 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면서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입니다.



우리는슬리퍼커플.jpg


keyword
이전 22화오늘도 쌩쌩 달려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