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대형 마트의 식품 코너에서
연어초밥 한 팩으로 포장되어 있던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오후까지 팔리지 못한 생선초밥들에는
파격적인 할인 가격표가 붙기 시작했거든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답니다.
아름다운 빛깔의 숙성된 연어가 올려져 있던
우리 연어초밥 팩에도, 자존심 상하게
할인가격 스티커가 떡... 하니 붙지 뭐예요.
내가 아무리 신선도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도 말이에요.
나의 자신감과는 별개로 인간들에게
내 가치가 이미 떨어져 버린 순간을 느낄 때
너무 마음이 슬퍼요. 그럴 때면 부끄러움에
연어가 더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럴 거면 가격 세일하기 전에
빨리 팔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아까 먼저 떠나간 광어 초밥이나, 새우 초밥,
모둠 초밥들이 부러워지려고 하네요.
나도 조금 일찍 마트를 떠났더라면
내 몸값이 내려갔다는 수치스러운 스티커를
붙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골라골라 떨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가격 낮춰가며 팔려가는 기분은 정말 별로예요.
인간사만 뜻대로 안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생선초밥 세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더위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속상해요. 정말!
나는 아름다운 연어초밥이었단 말이에요.
할인된 가격표 붙이고도 늦은 오후가 되도록
나는 마트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자존심이 있는 대로 무너지고 있던 중이었어요.
도대체 왜 나의 이 아름다운 빛깔에
인간들이 반하질 않는 걸까요.
나 이렇게 신선한데!
저녁 시간도 넘긴 조금 늦은 시간에
한 손님이 초밥 코너를 찾아왔어요.
할인가격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선택했죠.
그때쯤에는 나도 마음이 많이 회복되어
오늘이 가기 전에 선택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사실 내가 계속 마음이 초조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요.
어떤 경우에도 내가 누군지를 잊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던 연어초밥이 나였어요.
우울하면 나의 연어 빛깔도 흐려지고
그러다 맛에도 영향을 끼치면 어떡해요.
그래서 늘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쓰는
연어초밥, 그게 바로 나예요.
"자, 이제 마트를 출발해 보자고!"
오늘 연어초밥 가문의 자부심을 걸고
손님이 만족할 만한 신선한 맛을 제공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드디어 손님의 집에 도착했어요.
장바구니에 담겨온 음식들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된답니다.
설마 오늘 밤에 이것들을 다 꺼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당연히 내가 1순위일 거라 믿었어요.
신선도를 생각해서 연어초밥인 나에게
집중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내 순서가 밀리더라고요.
완전히 나를 실망시키는 손님이지 뭐예요.
사 온 메뉴를 다 펼쳐 놓고 먹다가
어느 순간 본인도 놀라서 말했어요.
"어쩌면 좋아. 아깐 너무 배고파서
이성이 마비됐던 게 틀림없어.
오밤중에 너무 많이 먹었잖아.
그나저나 큰일이네. 파격 할인해 가면서
팔려던 연어초밥인걸 보면, 오늘 반드시
먹어치워야 할 거 같은데...
그렇지만 나는 너무 배불러!!!
생선초밥 상할까 봐 걱정도 되는데
일단 연어만 벗겨서 먼저 먹어버리고
밥 뭉치는 내일 먹자."
그 말을 듣는데 난 기가 막혔어요.
내가 동의한 적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려고 하니까요.
"어? 어? 어? 나는 연어초밥인데?
연어초밥에서 연어를 떼버리면
나는 더 이상 연어초밥이 아닌 거잖아요.
그렇게 벗겨 먹을 거면 초밥을 사지 말고
그냥 연어 회를 샀어야죠."
하얗고 귀여운 밥 뭉치 위에
고추냉이를 살짝 얹은 후,
고운 빛깔의 붉은색 연어가 살포시
아래의 밥 뭉치를 감싸듯이 눌러주면 끝!
그렇게 셋이서 조화를 이룬 것이
연어초밥의 아름다운 모습이란 것을
인간이 잊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나의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다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외침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연어를 다 떼어내 먼저 먹어버린 당신!
연어들은 그렇게 밥 뭉치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오늘 하루는 참 힘든 날이에요.
나의 가치를 할인이라는 말로 낮추어
자존심 상하게 만들더니,
생선초밥인데 생선이 사라지게 만들어서
또 나를 슬프게 만들어 버리는군요.
내가 얼마나 보들보들 야들야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연어초밥인지 아세요?
붉은 빛깔의 고운 연어가 포인트인데,
왜 마음대로 연어 옷을 떼어내냔 말입니다.
선녀가 날개옷을 잃어버렸을 때
막 이런 당황스러운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연어초밥인 내가 연어도 없이
고추냉이만 찔끔 묻은 밥 뭉치가 되도록
만들어버린 당신 나빠요.
당신 때문에 내 연어초밥으로서의 프라이드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요.
밥만 뭉쳐 있는 나를 좀 보세요!
저기 어디서 누에고치가 나를 보면,
내가 자기네 종족인 줄 알았다고 달려와서
안기게 생겼잖아요.
아니면 고추냉이를 발라서 새로 나온
신상 한과냐고 오해하면 어떡해요.
나는 연어초밥인 내가 좋았단 말입니다.
그런 내가 연어들과 강제로 생이별을 당했어요.
당신 때문에!
고추냉이로 점 찍힌 밥 뭉치가 되어버린
어색한 내 모습에 적응할 사이도 없었어요.
신선한 연어는 오늘을 넘기면 안 된다는
인간의 강박에 의해, 강제로 연어가 분리되는
생선초밥의 슬픔을 아시나요?
다 먹질 못하고 4개 남은 밥 뭉치들은
랩에 씌워진 채로 냉장고로 들어가게 됐답니다.
냉장고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
오늘 하루동안의 내 연어초밥 생에 대해
돌이켜보았어요.
연어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연어초밥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아픔을 겪고 보니,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나의 짝꿍 연어에 대해
감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어가 나를 감싸 덮어주고 있을 때는
내 몸이 지금보단 촉촉했었어요.
이불이자 옷 역할을 해주던 연어가 없으니
남은 밥뭉치들이 얼마나 빨리 건조해졌는지 모릅니다.
말라가면서 밥알이 까슬까슬해져 버렸어요.
나는 냉장고 안에서 보내던 새벽 시간이
정말 슬펐어요.
"연어야, 보고 싶어"를 밤새 외쳤답니다.
연어와 나는 함께 있었을 때에야 비로소
연어초밥의 아름다움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연어가 없는 밥 웅치의 몸이 되고서야 깊이 깨달았어요.
나는 이때까지 내가 밑에서 잘 받쳐주어
연어를 빛나게 해 준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연어가 위에서 나를 감싸주어서
촉촉함을 유지하게 해 주고 있었단 걸
난 왜 몰랐던 걸까요.
"연어야, 미안했어. 잘난 척해서 미안해.
나는 혼자서 연어초밥이 될 수 없단 걸
너무 늦게 알았어."
그리고 연어가 없는 상태의 고추냉이는
내 몸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알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서, 무지 매운 약을 바르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아, 생각할수록 연어가 참 소중한 존재였네요.
역시 잃어봐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더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같은 팩에 들어있던 연어초밥인데도
각 뭉치마다 운명이 달라졌던 것도 슬퍼요.
먼저 선택된 연어초밥들은 이미 입속에서
부드럽게 살살 녹아 임무 수행을 마쳤답니다.
그런데 나는 연어초밥으로서의 임무수행도
못 마쳤고, 연어도 없이 이렇게 냉장고 안에
머물고 있네요.
인간의 입속에 들어갈 오늘의 임무수행에
실패한 나는,
수분이라고는 없이 몸이 바짝바짝
계속 말라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건조해지기 전에
빨리 입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신선도가 최고 자부심인 생선초밥인데
생선초밥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마무리까지 엉망으로 해선 안 되는 거잖아요.
냉장고 안에서도 너무 속상해서
밤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이 속상한 마음을 남은 밥 뭉치들끼리
위로하며 보냈어요.
슬픔이 가득 차서
아침이 오지도 않을 것만 같더니
그래도 아침은 오는군요.
간밤에 연어만 먼저 먹어버렸던 손님은
자신의 만행은 알지도 못한 채로,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너 말이야.
밥만 뭉쳐 있으니까 꼭 모형 같아.
고추냉이만 바른 미니 주먹밥 모형? 호호호.
딱딱한 플라스틱 모형처럼 보이긴 해도
은근히 귀여운걸."
이 인간은 끝까지 비호감이에요.
연어초밥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제발 마음대로 아무 이름이나 막 갖다 붙이지
말라고요.
나는 잊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내가 비록 연어는 벗겨지고
밥 뭉치만 남은 신세가 되었어도,
내 몸에 남아 있는 연어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나는 분명히 연어초밥이었어요.
당신이 아무리 잊는다 해도 나만은 기억할 거예요.
어젯밤에 먹고 남은 음식들을
아침에 마저 먹던 손님은,
남은 밥 뭉치 조각 중에서 하나를 입에 넣었어요.
"고추냉이가 발라진 밥이라서 그런가?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에 입안에 쏙 넣으니까
입속을 개운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네.
밥 뭉치 너, 야무지게 쓸모 있다!"
뭐지?
병 주고 약 주고 다 하는 인간이네요.
나는 당신 때문에 화도 났었지만,
당신 덕분에 고마운 것도 생겼어요.
연어초밥으로서의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은
절대 없다고 생각하던 나였어요.
알싸한 고추냉이 찍힌 채로 말라가던 내게,
다른 길도 있음을 느끼게 해 줘서 고마워요.
야무지게 쓸모 있다는 말이 큰 힘이 됐답니다.
자, 이제 입을 크게 벌려보세요.
드디어 나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할 시간입니다.
비록 겉모습이 건조하고 딱딱해졌지만
마음만은 그 어떤 때보다 촉촉하답니다.
이제 나는,
누구나 쓸모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당신의 입맛을 개운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밥 뭉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