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재능을 펼쳐볼까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나 참 기가 막혀서!

억울하게 욕을 먹었지 뭐예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 말이죠.



주인은 필기할 때 취향이 확실해요.

손에 힘이 많이 안 들어가도 되고

촉촉하고 가늘게 써지는 펜이 좋다고 하더군요.

내가 바로 주인이 좋아하는 수성펜이랍니다.


나를 좋아하는 주인을 만난 건

너무나 기쁜 일이었죠.

주인은 노트에 써넣는 나의 흔적들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날은 이불에 엎드려서 메모를 했던

주인이 문제였어요.

피곤했는지 스르르 잠이 들면서

뚜껑도 안 씌운 나를 손에서 놓아버린 거예요.


내가 구르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주인의 손에서 놓여나자마자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가게 되었어요.

구르면서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주인을 향해 막 소리쳤어요.


"눈뜨세요!

나 뚜껑 열려있단 말이에요.

뚜껑은 닫아주고 다시 자요!"


수성펜인 나를 뚜껑 열어 방치하면

내일쯤엔 잉크가 다 말라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순간이기도 했죠.



구르면서 이불에 닿은 것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종이 말고 다른 촉감은 처음이었거든요.

종이에 닿을 때는 매끈매끈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불에 닿을 때는 뭐랄까.

보들보들 푹신푹신한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종이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그때 나는 뚜껑도 열린 상태였잖아요.

내 잉크가 곧 말라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너무나 큰 상태였고요.

수성펜으로 활약을 못하게 되기 전에

이불에 나의 흔적을 남겨놓고 싶었지만

주인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있는 다해서 이불에다

쪽 하며 뽀뽀를 했답니다.

점을 찍기 위해서였죠.


나는 그냥 점만 찍으려고 했던 건데,

내가 수성펜이라는 것이 이불에게는

민폐가 되더군요.

작디작은 점이 점점 번지기 시작했어요.

점이 아니라 무슨 얼룩 같았죠.

점이 번져서 커다란 점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하필 그때 잠들어 있던 주인이 몸을 뒤척여서

수성펜인 나를 옆으로 밀어버린 겁니다.

주인의 팔에 눌리면서 나는 다시

이불에 점을 찍는 뽀뽀를 하게 됐어요.

어떡해요. 또 하나의 점이 찍혔어요.

동시에 또 하나의 얼룩이 번져갔어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쩔쩔매고 있는데,

뒤척이던 주인이 나를 또 옆으로 밀었어요.

세 번째 점이 찍히면서 번졌어요.

그렇게 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얼룩이 세 개 생겼지요.


수성펜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이

번지지는 않았을 텐데...

나와 주인의 실수가 합작품으로 만들어낸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주인은 잠도 한 번 안 깨고 잘만 자는데

나는 너무 미안해서 울면서 밤을 보냈죠.



나는 이불에게 사과를 했어요.

"이불아! 너한테는 정말 미안해.

점을 세 개나 찍어서 얼룩지게 만들었네."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나는 오랫동안 같은 무늬로만 살았잖아.

새로운 디자인 생겨서 기분전환 됐는걸. 호호"


내가 많이 울어서 불쌍해 보였나 봐요.

착한 이불은 오히려 나를 위로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말을 예쁘게 해주는 이불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요.


그런데요.

정작 피해자인 이불은 나를 위로해 주는데,

잠에서 깨어난 주인이 이불에 찍힌 점을 보더니,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잖아요.


"야!!! 수성펜, 너 뭐야!

누가 맘대로 이불에다 잉크 자국 내라고 했어.

아... 짜증 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건지

듣고 있자니 화가 났어요.


애초에 이부자리에서 필기를 하지 말던가,

사용했으면 뚜껑을 잘 닫아주던가,

잠결에 몸을 뒤척이지를 말던가!

모든 것이 주인 탓인데 왜 나한테만

뒤집어 씌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미안한 건 이불뿐이에요.

나 진짜 억울하다니까요.

주인한테는 들리지도 않을 테지만

소리라도 좀 지르고 나니까 속이 시원했어요.


짜증 낸 주인은 자기도 멋쩍으니까

뚜껑을 찾아서 내게 씌워주면서

그제야 내 걱정을 하더라고요.


"밤새 뚜껑이 열려 있었는데도

잉크가 말라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뾰로통해 있었던 내 마음을 완전히 풀어준 것은

주인의 이 말 때문이었어요.


"수성펜, 너 말이야.

번지는 그림에 소질 있나 봐.

어쩜 이렇게 얼룩의 크기도 모두 다르니?

자꾸 보니까 매력 있어.

오래된 이불에 얼룩점으로 리폼한

아주 창의적인 수성펜일세. "


주인은 이미 벌어져버린 일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것 같았어요.



근데 나는 아무래도 팔랑귀를 가진

수성펜인 가 봐요.


주인의 말에 화났던 건 사르르 녹아버리고

내가 정말 창의적인 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지 뭐예요.

어쩌면 내가 번짐의 미학을 제대로 아는,

특별한 펜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답니다.


너무 신나서 얼룩에다 제목도 지었어요.

이불에 그린 내 첫 작품의 제목은

<얼룩 점 세 개>랍니다.


잠자고 있는 나의 예술성을 제대로 펼쳐보려면

다음에는 이불 말고 어디다가 도전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했어요.


좋았어! 나의 재능을 펼쳐볼까.



수성펜이그린점세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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