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창작동화
주인이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깨끗해 보이는 느낌이 참 좋았다고 했어요.
내가 반지르르 매끈한 흰색이었거든요.
길쭉한 느낌도 좋았다고 했어요.
뭔가 시원시원하게 일도 잘할 것처럼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았던 마음이었는데
정말 순식간에 바뀌었어요.
주인이 나에 대한 마음이 식은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내가 너무너무 뜨겁기 때문이래요.
하긴 내 바람이 남들보다 뜨겁긴 해요.
많이 강렬하죠!
주인은 적당히 따뜻한 것이 좋은데
나의 넘치는 열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내가 자기의 머리를 너무 뜨겁게 만든다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멀어진 이유는
차가워서도 아니고 미지근해서도 아니고
내가 너무 열정 넘치게 뜨거웠기 때문이랍니다.
나의 뜨거운 바람이 주인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니 너무 속상했어요.
그리고 나더러 너무 시끄럽다고 했어요.
윙 소리가 너무 크다지 뭐예요.
청소기도 믹서기도 다 소리는 크던데
왜 나한테만 유독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주인은 나를 만난 이후로
내가 싫은 이유만 매일 찾고 있었나 봐요.
내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것도 싫대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를 선택하지 말았어야죠.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생겨있었는걸요.
이미 내 덩치도 알고 선택했으면서
지나고 나서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양심 불량이에요.
반으로 안 접어지는 것도 불만이래요.
나더러 요가 동작이라도 배워오라는 거야 뭐야.
아니면 멀쩡한 드라이기인 나를 반으로 뚝
부러뜨리기라도 해야 하나요?
처음부터 접을 수 있게 만들어지질 않은 나에게
왜 그런 것을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나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들만 터뜨리며
내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주인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히
나에 대해 호감이 가득했었답니다.
그 눈빛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걸요.
이렇게 빨리 마음이 식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오래오래 잘 지낼 거라 믿었으니까요.
주인이 내게서 멀어지면서
가장 대못을 박은 말이 이거였어요.
시원한 바람이 필요한 주인에게
그것을 줄 수 없는 나는 쓸모가 없다고 했어요.
아, 정말 말도 안 돼요.
나에 대한 오해까지 하고 떠난 건
너무 속상해요.
"이봐요. 그건 정말 오해라고요.
나도 따뜻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을
둘 다 가지고 있는 헤어 드라이기인걸요.
왜 나의 버튼을 자세히 봐주질 않는 거죠?"
나는 주인에게 정말 서운했어요.
자기 콩깍지 벗겨졌다고 눈앞에 있는 버튼도
제대로 보지 못하니 말이에요.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드는 불만 가득한 눈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나를 애정의 눈으로 봐주었다면
금방 보였을 버튼인데...
그 버튼 하나가 보이지 않는 우리 사이!
현실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어요.
주인은 확인해 보려는 마음이 없었어요.
내가 시원한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아주 당당하게 새 드라이기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드라이기가 등장했죠.
주인이 하얀색인 나에게 질렸다는 것을
새 물건의 색깔로도 드러내 주었답니다.
이번엔 검은색과 옅은 갈색이 어우러진
세련되어 보이는 드라이기였어요.
나 보란 듯이 데려온 드라이기는 매력적이었어요.
나보다 크기도 작아서 가볍고,
반으로도 접어져서 공간도 덜 차지하고,
나보다 소음이 적었어요.
그리고 바람도 적당했어요.
나처럼 너무 뜨겁기만 한 바람이 아니라,
바람세기를 선택할 수 있는 친구였죠.
나한테는 그렇게 심드렁하던 주인이
새 드라이기와는 너무 잘 지내더라고요.
"아휴! 얄미워!"
나보다 더 좋은 드라이기를 못 만나길 바랐는데
나보다 편리하고 장점 많은 드라이기를 만났음을
인정하게 되지 뭐예요.
나도 새 드라이기를 보기 전에는
"내가 뭐 어때서?
나만큼 화통한 드라이기 있으면 나와봐."
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요.
다른 드라이기가 내 자리를 꿰찼는데
정말 나보다 모든 것이 더 나으니까
자신감은 사라지고 부럽고 속상한 마음만
가득해지지 뭐예요.
새 드라이기는 성격도 좋았어요.
구석에 있는 나한테도 늘 인사를 건네곤 했어요.
"쟤는 왜 미워할 수도 없게 멋있고 그래?"
나는 그렇게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주인이 급하게 서두르다 컵의 물을 쏟아서
입고 있던 청바지가 젖었어요.
바로 그 순간에 주인이 떠올린 것이
누구였는지 아세요?
바로 나였답니다.
내 바람이 너무 뜨거워서 싫다더니
나 정도의 뜨거운 바람이어야
빨리 바지를 말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너무 얄미웠어요.
"나는 뜨거운 바람 따위는 없소"라고
작동을 거부할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급해 보였어요. 옛정이 뭔지
"옜다 뜨거운 바람의 위력 좀 봐라" 하는 심정으로
바지를 금세 말려주었죠.
젖었던 청바지가 멀쩡해진 것을 보더니
나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지 뭐예요.
식어버렸던 눈빛에서 다시 애정이 들어간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어머 어머! 너의 적성이 이쪽이었구나?
머리카락은 다 태울까 봐 걱정이었는데
바지의 물기는 너무 잘 말리네.
너의 뜨거움이 이렇게 큰일을 해내다니 멋지다."
"이봐요. 나는 원래 멋졌거든요?
내가 이 정도로 화끈한 바람을 뿜어내는
드라이기였다고요."
오랜만에 내 실력 발휘를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나를 막 칭찬하며 웃던 주인이
갑자기 눈이 커지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어요.
"세상에! 너도 시원한 바람 선택이
가능한 애였구나?
나 그때는 정말 몰랐었어.
제대로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내 탓이야.
드라이기야, 정말 미안했어."
늦게라도 주인에게 사과를 받아서 좋아요.
바람 선택도 안 된다는 자존심 상하는
오해라도 풀렸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쁜 건요.
나의 쓸모가 사라졌던 이 집에서
다시 내가 할 일을 찾았다는 거예요.
뜨거운 바람 슝슝 강하게 내뿜으며
바지를 말려보니까, 나한테는
머리를 말리는 일보다 더 좋아요.
젖은 옷이나 양말을 급하게 말릴 때
내 뜨거운 바람이 최고의 능력치를 발휘하더라고요.
급한 일에만 집중해서 일하면 되니까
여유롭기도 하잖아요.
내 적성에 딱 맞고 너무 좋아요.
나의 존재감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뭔가 급하게 말려야 할 것이 생기면
이젠 당연하다는 듯이 주인이 나를 바라본답니다.
나만 믿는다는 눈빛으로요.
요즘엔 주인뿐만 아니라 갈색 드라이기도
나를 자주 쳐다봐요.
"저는 선배님이 너무 부러워요.
머리 말려주는 일은 매일 해야 하지만,
주인이 아무리 덤벙대도 바지에다 물을
매일 쏟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나는 대놓고 웃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호호 웃음이 난답니다.
가끔 일하고도 많은 칭찬을 받는 나를
부러워하는 갈색 드라이기를 보며
내가 그 애를 부러워했던 때가 떠오르거든요.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나요.
지금의 나는 존재감이 확실해요.
갈색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보다
내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젖은 부위를 순식간에 말릴 수 있거든요.
내가 쓸모 있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기뻐요.
생각해 보면요.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보이지 않는 주인 때문에
나의 쓸모가 사라지는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런 나에게 또 다른 쓸모를 찾아준 사람도
우리 주인이거든요. 그래서 미움을 거두고
감사만 하려고 결심했답니다.
덕분에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어요.
지금의 내가 좋아요.
앞으로도 뽀송뽀송 전문가로 거듭날 나를
지켜봐 주세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