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혹시나 기대해 본다

그 이유라면 늦어도 OK~

by 고스란

오후 8시 37분.

아들의 연락을 기다린다.

고등학고 2학년인 아들의 학원수업이 끝나 전화를 할 시간이 되었다.

혹시라도 수업이 늦어지는 것일까 봐 전화를 먼저 못 걸었다.


그 사이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에게 통화 중이니 카톡을 하라고 남겼다. 얼마 전 통화 중에 연결이 될 줄 알고 마냥 통화하다가 연락이 안 된 아들이 40분을 걸어 집에 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화 중에 표시될 때와 안 될 때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드디어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끝났어? 지금 나갈까?"

"아니요. 지금 친구들하고 걸어가고 있어요. 10분 후에 출발하세요."

학원 가까이 사는 친구 아파트까지 같이 걸어가 타는 일이 종종 있어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10분 후에 출발하라는 말이 걸렸다.

늘 거기까지 걸어가는 시간이나 내가 출발해서 가는 시간이나 비슷하기에 따로 10분 여유를 두지 않는다.


혹시,

기대를 해본다.

아니면 어쩌지?

괜한 기대에 실망을 하게 될까 살짝 두렵기도 하다.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출근길에 아버님, 어머님께 전화로 감사인사를 드렸다.

생각보다 바쁜 일정에 엄마, 아빠께는 오후에 연락드렸다.

며느리로 사는 게 딸로 사는 것보다 조금 더 신경 쓰이는 것이다. 남편은 오전에 친정부모님께 전화드렸다고 했으니 서로 서운할 건 없다.


정작 부모인 우리는 아들에게서 축하인사 내지는 감사인사를 못 받았다.

말로 가르치고 받아낼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후자를 택했다.




오후에 아들에게 연락하니 노래방이란다.

중간고사가 지난주에 끝났고 연휴 동안 친구들과 못 놀았으니 그럴 수 있다.

아직도 아들 머릿속엔 어버이날은 없는 듯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냐고 카톡을 하려다 말았다.

기다렸는데 아무 말 없어 아쉽다고 썼다가 지웠다.

저녁은 뭐 먹고 싶냐고 썼다가 지웠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부모님과는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우리 가족 얘기였다.

어버이날이라고 축하도 없는데 무슨 식사냐고 했더니 T day란다.

어이없음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치킨이 할인이라며 둘이 한 마리씩 시키자고 한다.

치킨 먹을 맛도 안 났지만 그래도 주문했다.

아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로 고른다.


아무래도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성토했다.

몰라서 그렇단다.

그럴 리가 없다.

초등학생 내내 카네이션을 만들고 편지를 써서 전해줬다. 중학생 때도 어버이날이라고 몇 자 적은 카드도 내밀었다.


자식이 보고 자란다고.

그래도 나는 부모님께 잘해드렸는데 내가 이런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속상함이 밀려들었다.


아들이 오기 전 우리 둘이 먼저 치킨을 먹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부위를 따로 덜어두었다.

남편은 운동을 가고 난 아들을 기다린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기다리며 서 있는 아들이 보였다.

내 눈이 절로 아들의 두 손을 향했다.

아무것도 없다.


아들이 뒷좌석에 탔다.

잘 다녀왔다, 피곤하다, 내일은 뭘 한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대화 속에서 나는 무얼 기대하고 있었을까.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치킨 얘기를 해두었기에 치킨을 데워 차려주었다.

아들을 보면 섭섭함이 올라올 거 같았는데 막상 9시가 다 되어 저녁을 먹어야 하는 아들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먹을 것을 차려주는 나를 보며 오늘이 어버이날인 거 안다고 한다.

꽃을 사 올까 하다 며칠이면 시들어 죽을 거 같고 조화는 별로라서 같은 가격이면 먹는 걸 사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 사 왔다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두 손으로 들어 올린 것은 바나나우유 4개들이 팩

아빠랑 2개씩 나눠 먹으란다.

나의 최애 음료로 아주 가끔 내 몫으로 떼어놓고 먹는다.

그리고 과자 2봉지, 초콜릿 2개.

둘이 똑같이 드시라고 세트로 사 왔단다.


얼굴이 확 폈다.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알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도 준비했다.


고맙다며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을 만큼 커버린 아들은 내게 안기려 몸을 살짝 숙여준다.

이뻐서 두 볼에 뽀뽀해 주었더니 아들도 내 볼에 뽀뽀해 준다.


꺼내놓은 간식들을 가져다 얼른 사진 찍었다.

더 멋있게 찍었어야 했지만 뭐든 좋았다.



양가 어른들께 전화드리라고 했더니 어버이날인데 자기가 왜 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싫은 내색은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밝은 목소리로 전화드린다.


네 분도 나와 같으셨을 것이다.

손자가 밤까지 연락이 없다며 서운해하셨다가,

이해를 하셨다가, 기대를 하셨다가, 체념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저 반갑고 기쁜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고생한다. 고맙다. 사랑한다.

다 같은 말씀을 하신다.






엄마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문득 생각났다.

기대는 하되 실망은 드러내지 말아라.

미안함과 고마움은 반드시 표현해라.






앞으로도 네게 쓰려다 지우는 글이 많을 걸 안다.

하려다 마는 말이 많을 것도 안다.

하지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고 할 것이다.


부모님이 내게 하셨듯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들이 건네준 책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