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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을 묻지 마라

정말 궁금하다면

by 고스란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복복서가, p.141




누구에게 내 가능성을 물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어렸을 때 허락의 의미로 가능 여부를 물어본 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기억이 닿는 시간 안에는 없다.


신이나 무당에게 묻는 것이 아닌 이상 가능성을 물어본다는 게 이미 답정너다. 물어볼 대상을 내가 정하고 물어보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땅히 그 답을 해줄 사람에게 물어본다. 만약 예상치 못한 답을 듣는다면 마음이 상하거나 의아해진다. 결국 내 마음 대로 할 거면서 결정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볼 심상이다.




가능성이 무엇인지 다시 찾아보았다.


가능성 可能性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


두 가지 뜻이 오묘하게 닮아있지만 다르다.




낱말의 뜻까지 알고 나니 확실하게 나의 가능성을 물어볼 단 한 사람을 찾았다.
바로 나다. 내가 나를 다 알아서가 아니다. 나에게 애정과 관심을 갖고 성장할 수 있는 성질이 있는지 발견해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조차 성장의 정도나 실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힘은 결국 내가 가졌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을 내고 싶은지, 내고 싶다면 언제 어디서 얼마큼 내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해봐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음’이 가능성이다. 하고 싶어야 할 수 있고 해 봐야 알 수 있다. 그 후에나 성장과 실현이 따라온다.


새삼스럽게 묻고 물어, 돌고 돌아 나에게 왔다. 가능성을 알고 싶은가? 그럼 하고 싶은지 나에게 물어보면 된다.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물어보자.

작가가 되고 싶어?

더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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