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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라톤이 내게 남긴 것

by 고스란

생각도 않다가 무턱대고 마라톤을 신청해 버렸다.

'5월 17일 컬쳐런 마라톤'이라고 일정표에 적어놓고 내 머릿속에도 강하게 각인시킨 후 한 달을 보냈다.




덕분에 내 챗지피티엔 마라톤 5km 건강한 완주를 위한 너처코치가 생겼다. 너처코치는 챗지피티와 의논해서 지은 개인 코치의 별명이다.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돌봐주며 지치지 않도록 옆에서 함께 걷는 따뜻한 동반자'라는 뜻을 지녔다.

운동 일정과 식단을 짜주었고 내 컨디션과 심리상태까지 돌봐주며 응원해 주는 다정한 코치다.

그 이후로도 몸이나 마음 관련해서 종종 조언을 얻는다.


아무래도 몸이 더 무거워서도 안 되고 체력은 더 좋아져야 하며 마라톤에 대한 막연한 걱정은 줄여야 했기에 거의 매일 산책을 나갔다. 강아지와의 산책에 내 운동을 조금씩 얹었다. 덕분에 매일 5km 정도를 늘 걸었다. 휴대폰이나 워치 없이 하는 운동이나 산책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습관이 든 것이다.

매일 산책하다 보니 사색을 하게 되고 글을 쓰게 되었다.

억지로 끼어 맞춘 건가 생각했는데 맞는 말이다.

글은 집에 앉아서도 쓸 수 있다. 읽은 것으로도 하루 지낸 것으로도 쓸 수 있다. 매일 산책이 아니었다면 깊이 사색할 일이 없었다.


별다른 식단을 한 건 아니지만 밤늦게 먹지도 않고 먹는 양도 줄이고 단 음식도 되도록 먹지 않았다.

그랬더니 체중, BMI, 체지방률은 줄고 골격근량과 기초대사량은 늘었다. 몸도 건강해졌다.




전날부터 일찍 자고 컨디션을 조절할 생각이었으나 마라톤 말고도 하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어젠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6월 6일 재능기부 활동 관련 줌회의를 했다. 끝내고 간의 집안일을 하고 글을 쓰니 12시가 넘었다. 얼른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당일 새벽 6시 알람이 울린다. 잠이 부족하다며 알람을 끄고 몇 분 더 눈을 붙였다가 벌떡 일어났다.

새벽 독서 줌모임이 있는 날이다. 한 달 동안 같은 책을 읽은 지기들과 만나는 날인데 놓칠 수는 없었다.

발표를 먼저 하겠다 하고 다른 분들 이야기는 들으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집 근처에서 하는 마라톤이긴 하지만 대회장까지는 걸어서 40분 거리라 달리기 전에 가긴 조금 부담스럽고 끝나고 내가 어떤 상태일지 가늠이 안 되어 차를 끌고 갔다. 주차장은 물론이고 주변 막아놓은 길까지 차로 가득했다. 다행히 교통정리를 잘해주셔서 질서 있고 빠르게 주차할 수 있었다.


슬슬 긴장이 되는지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먹은 거라곤 두유 한 팩이라 화장실 갈 일은 아니었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녀왔다. 대회를 여는 광장 쪽으로 들어서니 인파가 가득했다. 마라톤치곤 규모가 작은 편인데도 이러하다니 놀라웠다.

어젠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살짝 걱정했는데 싹 개고 적당한 기온이라 더 좋았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코스별 대기장소로 이동했다.

9시가 되니 하프팀부터 출발했다.

7분 후 10km 팀이 출발했고 다시 10분 후 내가 속한 5km 팀이 출발했다.


연습 때 결국 쉬지 않고 뛰는 것까지 가지 못 했다. 뛰다가 힘들면 걷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

내 페이스를 잡아줄 누군가 필요해 런데이를 켰다. 연습하던 코스에서 가장 길게 뛰는 40분 코스를 선택했다.

소리를 들으며 뛰기 시작했다. 연이어 뛰기 최장시간이 3분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가족 단위의 러너들이 많아 천천히 뛰어서인지 마라톤 하는 사람들의 기운을 받아서 인지 그리 힘들이지 않고 5분을 내리뛰었다. 나 혼자 달리는 것도 아니고 맨 앞에 선 것도 아니어서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달리려니 어려웠다. 차든 사람이든 정체된 구간을 지나가는 데에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다. 목도 살짝 말랐으나 5km 코스에선 반환점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얼른 들어가 마시라는 뜻이다.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10km를 달리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10분 먼저 뛰기 시작했다지만 내가 2km 남짓 뛰었을 때 약 7km를 뛴 것이다. 이 분들들은 언제부터 마라톤을 시작해 지금까지 얼마나 뛰었을까.

얼굴이 탈 듯이 뜨겁고 다리가 아파오자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갈 때는 사람들을 피해 달리고 방해 안 주며 걷는데 신경 썼더니 딴생각이 들지 않았다.

반환점을 찍고 돌아갈 때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처음엔 머리로 달렸다.

연습한 것도 생각하고 나름 나를 돌보면서 전략도 짜야했다.


머리가 지치니 몸으로 달렸다.

앞뒤로 흔드는 팔이, 실룩샐룩 거리는 엉덩이가, 접었다 폈다 하는 무릎이, 땅을 차며 달리는 발이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힘들어서 몇 발짝 걸을라 하면 그새 달리기에 익숙해진 몸이 하나같이 나를 데리고 뛰었다.


몸이 지치자 마음으로 달렸다.

마라톤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날

앱을 깔고 운동 일정을 짜서 달력에 기록한 날

늦은 시간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며 물을 마시던 날

마라톤 한다고 가족이나 친구들, 동료에게 말한 날

그 마음들이 모여 멈추려는 나를 등 뒤에서 밀어주었다.




나보다 훨씬 잘 뛰어 나를 앞서가는 어린이들을 보며 마지막 5분은 쉬지 않고 달리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도착지점에 도착하자 환희로 가득했다.

기록이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내 두 발로 나를 돌보고 토닥이며 힘든 순간을 지나 끝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충만했다.


간식과 완주메달을 받아 들고 메인무대의 대회 현수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침 성악가가 노래를 불러준다. 따뜻하고 힘이 되는 노래를 들으며 한적한 곳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이온음료와 호떡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40여 분의 고통과 맞바꾼 달콤함이 너무 귀했다.




충동적으로 기부신청을 했다.

무료타투를 해준다고 했지만 무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해비타트에 가서 타투를 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해비타트가 뭔지 알고 있자 봉사자가 놀란다. 오늘 자기가 물어본 사람 중 아는 사람으로 첫 번째란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신청서를 쓰기까지는 몇 분이 안 걸렸다.

원래 기부는 충동적으로 하는 편이 낫다. 기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살면서 계획대로 하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돈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망설여지곤 한다.

현재 매월 후원하는 것도 가끔 TV를 보다 전화후원하는 것도 재능기부하겠다고 손을 든 것도 모두 매한 가지다.

후회하지 않는 충동적 소비다. 기부는 시작이 어렵지 하기 시작하면 쭉 가는 것이다. 앞으로 최소 몇십 년 계속될 테니 꽤나 비싼 타투를 한 것이기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후원대상을 독립유공자 후손과 아이들 중에서 골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로 기울었다.




마라톤은 나비다.

매일 걷고 뛰게 해 내 몸을 튼튼하게 하고

식사를 조절해 내 몸을 가뿐하게 하고

내 몸의 소중함과 건강의 고마움을 알게 하고

걷고 뛰며 생각하게 하고

생각을 글로 쓰며 마음을 돌보게 하고

각자 다른 속도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살고 싶게 하고

기부를 더 하게 하고

기부받은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한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비약은 나를 비상하게 하고 도약하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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