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담아둘까
흐리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부는 날이다.
아직 5월인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하루였다.
주말 마라톤 이후 편도염을 앓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어제 외부활동 후 배드민턴까지 해서 그런지
오늘 본업무 이후 추가업무까지 해서 그런지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며칠이다.
이럴 때는 마음이 몸을 봐주는 수밖에 없다.
괜찮은가 조용히 살피다가 할만할 때 얼른 데리고 움직여줘야 한다.
그냥 알아서 하길 바랐다가는 며칠이고 푹 퍼진다.
습관이 되어 일으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피자를 찾고 아들도 데려온다는 남편 말에 강아지를 핑계로 집을 나선다.
흐린 밤은 까맣지 않다.
아주 짙은 회색바탕 하늘이다. 달은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다.
풍경은 흐릿하고 들리는 소리도 별로 없다.
오늘 밤 나의 주인은 코다. 현관문을 여는 동시에 바로 주인행세 시작이다.
몇 미터 앞 중학교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나만의 달리기 전용 도로를 걷는다. 양 옆으로 인도가 따로 있지만 지나는 차가 거의 없어 한가운데로 걷는다. 노란 중앙선도 그어 있지 않은 2차선 폭 300미터 길이의 도로는 나와 강아지의 넓은 산책길이 된다.
왼쪽 비어있는 땅엔 자연스럽게 나고 자란 아까시나무가 가득하다. 오른쪽은 불 꺼진 중학교와 내년 개교를 앞둔 고등학교 공사장 높은 철판벽을 배경으로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다.
향기로운 꽃냄새는 공기 속 작은 물방울에 갇혀 미적지근한 바람을 타고 날리다 여기저기서 퐁퐁 터진다.
내딛는 걸음걸음을 모두 따라와 혼미하게 만든다.
내 발길은 나무 가까이로 향하고 눈은 하얀 꽃에 멈춘다. 코가 벌렁이며 향기를 들이마시자 향긋한 달콤함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가지가 흔들려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사락사락 난다. 미지근한 바람이 앞머리칼을 만져댄다. 나무에만 관심을 갖는 게 질투가 났는지 가로등이 엷은 광선을 쏜다.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자 인적이 드문 인도를 만난다.
발길이 없어 밟히지 않은 풀들이 나란히 자라 오솔길이 생긴다. 커다란 나무의 긴 가지가 꽃을 주렁주렁 매달아 인도 하늘 반쪽을 넘겨 향기로운 꽃터널을 만든다. 고작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길은 황홀한 시크릿 가든이 된다.
눈으로 담기에 아쉬우면 사진을 찍으면 되고
소리를 기억하고 싶으면 녹음을 하면 된다.
심지어 바람을 담고 싶으면 영상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밤바람에 취하게 하는
이 향기는 어디에 담아둘까
주인행세를 하던 코가 무책임한 방랑객이 된다.
덥기에 꽃이 가득하고
흐리기에 향이 짙어지고
바람 불어 멀리 날리니
오늘의 날씨는 향기로운 밤을 위한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