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 31일: I Love You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어떤 영화들을 보며 마무리하면 더 기쁘게 새해를 맞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네 편의 영화를 몰래 숨겨두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때로는 견딜 수 없이 무겁고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들. 두 사람을 대신해 내가 '사랑한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감독 임대형
각본 임대형
출연 김희애, 나카무라 유코, 김소혜
남편과 이혼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딸, 새봄과 함께 살고 있는 윤희는 일본에 살고 있는 오래전 친구, 쥰에게서 온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딸 새봄과 함께 쥰이 살고 있는 오타루로 여행을 떠난다.
윤희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감정을 부정당하며 살아왔다. 고등학교 친구였던 쥰을 사랑한다고 말한 이후, 가족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야 했다. 자신의 남은 인생이 벌인 것처럼 맘껏 웃지도 못하고 행복해하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쥰에게서 온 편지로 인해 자신의 삶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쥰 또한 오타루의 얼어붙은 눈처럼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 윤희와 함께 있는 꿈을 꿀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그저 그 마음을 부치지 못하는 편지에 고백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두 사람이 얼어붙은 과거로부터 나와 새 봄을 기다릴 수 있게 해 준 것은 쥰의 편지를 대신 부쳐준 그녀의 고모이며, 쥰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하고 윤희에게 오타루 여행을 가자고 한 새봄이었다. 두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윤희와 쥰은 겨울의 그림자에 갇혀 얼어붙은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영화는 쥰의 편지로 시작해 윤희의 답장으로 끝이 난다. 오타루에서 재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지만 특별히 두 사람의 대화나 행동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나누지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눈물을 보일 뿐, 그리고 나란히 걸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마지막의 "추신. 나도 네 꿈을 꿔"에서 감정이 폭발한다. 마치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나도 너와 같아"라고 말할 때처럼.
감독 토드 헤인즈 Todd Haynes
각본 필리스 나지 Phyllis Nagy
출연 케이트 블란쳇 Cate Blanchett, 루니 마라 Rooney Mara, 사라 폴슨 Sarah Paulson
1950년대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테레즈는 프랑켄버그 백화점 완구 코너의 판매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캐롤은 남편과의 이혼 조정 중으로, 딸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판매원 테레즈를 만나게 된다. 테레즈는 캐롤이 놓고 간 그녀의 장갑을 우편으로 보내주고, 캐롤은 그에 대한 답례로 식사를 제안한다. 캐롤은 테레즈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둘의 시간은 갑자기 들이닥친 캐롤의 남편 하지로 인해 방해받는다. 갑자기 찾아온 하지는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캐롤과 함께하기로 했던 딸아이를 갑자기 데려가고, 그녀와 테레즈가 함께 있는 걸 본 하지는 도덕성 조항을 내세우며 그녀의 동성애 성향을 문제 삼아, 서로 합의했던 공동양육권을 취소하고 공청회가 있을 때까지 딸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캐롤은 괴로워하며 여행을 계획하고, 테레즈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테레즈는 남자 친구인 리처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날 캐롤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해의 마지막 밤, 두 사람은 처음으로 키스를 나누고 잠자리를 함께한다. 아침에 일어난 캐롤은 전보를 받고, 하지의 지시로 누군가 두 사람을 따라와 어젯밤 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녹음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퀴어 영화는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주인공의 성 정체성이 드러나 주변으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괴로워하게 되는 갈등의 고조점에서 나 또한 주인공과 같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드러난다. 캐롤의 도덕성을 문제로 그녀에게서 양육권을 빼앗으려는 남편. 더 화가 나는 것은, 정말 캐롤의 도덕성이 문제라서, 그것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아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캐롤을 자신의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캐롤은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비록 양육권은 내어주지만, 딸아이도, 자신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1952년도 소설 'The Price of Salt'인데, 각색을 맡았던 필리스 나지에 의하면, 퀴어 소설 치고는 당시 흔치 않았던 해피 엔딩이라고 했다. 영화 후반부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몇 달 동안의 헤어짐 후에 재회하고, 캐롤은 처음으로 테레즈에게 '사랑해'라는 고백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시간의 테레즈를 알아본 지인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마치 영화 '밀회 Brief Encounter'의 로라와 알렉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밀회에서와 달리 테레즈는 다시 캐롤을 찾아가고,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게 된다.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는 '캐롤' 보다는 '윤희'의 마음이 더 깊이 와 닿았다.
감독 크리스 에반스 Chris Evans
각본 로널드 베이스 Ronald Bass, 젠 스몰카 Jen Smolka, 크리스 셰이퍼 Chris Shafer, 폴 비크네어 Paul Vicknair
출연 크리스 에반스 Chris Evans, 앨리스 이브 Alice Eve
늦은 밤,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트럼펫 버스킹을 하던 닉은 한 여자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채 급하게 뛰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정신없이 플랫폼으로 달려간 여자는 집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놓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걸어 나온다. 여자가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 닉은 그녀가 떨어뜨린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가 돌려준다. 이내 역에서는 곧 문을 닫는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닉은 역 앞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서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닉은 여자에게 도움을 주고자 괜찮은지 묻고, 여자는 지갑을 도둑맞아 돈도 없고 핸드폰도 망가진 상태라고 답한다. 그런 여자를 도우려던 닉은 자신도 핸드폰 배터리가 없음을,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도 없거니와 카드마저 사용 불가하다는 걸 알게 된다. 닉이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여자는 이내 곧 실망하고 혼자 길을 나서지만, 앞에서 걸어오는 불량배들 때문에 겁을 먹고 위축된다. 그러나 그때 닉이 나타나 남자 친구인 척하며 그녀 곁을 지켜준다. 그렇게 낯선 남자의 호의가 편하지만은 않은 여자와 불안해 보이는 여자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남자의 동행이 시작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뉴욕 버전이라고 하면 대충 짐작이 되려나? 다만 제시와 셀린느의 삶보다는 여기 뉴욕의 닉과 브룩의 삶이 더 복잡해 보인다는 것. 추운 겨울밤 뉴욕의 한 복판에서 만난 두 남녀가 하룻밤의 시간을 같이 보내며 서로를 오해하고, 알아가고, 마음을 나누고, 그리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브룩에게는 반드시 남편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집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고, 닉에게는 피하고 싶은 현실이 있다. 두 사람은 밤새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잃어버린 지갑을 찾고, 친구 결혼식의 피로연에 가고, 호텔에 간다. 그리고 어느새 자라난 서로의 마음을 누른 채 각자의 현실로 돌아간다. 궁금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브룩이 펴본 호텔 서비스 설문지 뒷면에 무어라 쓰여있는지... 왜 그녀가 웃었던 것인지...
감독 롭 라이너 Rob Reiner
각본 노라 에프론 Nora Ephron
출연 멕 라이언 Meg Ryan, 빌리 크리스털 Billy Crystal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저널리즘을 공부하러 뉴욕으로 떠나기로 한 샐리는 친구 아만다의 부탁을 받고 그녀의 남자 친구인 해리를 옆자리에 태우고 장거리를 이동한다. 뉴욕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여러 대화를 나누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이견을 보인다. 그렇게 18시간의 이동 후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헤어진다. 5년 후, 남자 친구 조와 만난 지 한 달 정도 된 샐리와 여자 친구 헬렌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해리는 우연히 비행기 안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또다시 5년이 흐른다. 결혼에 대한 인식 차이로 조와 얼마 전 헤어진 샐리와 아내가 바람을 피워 이혼을 한 해리는 우연히 서점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기로 한다.
영화는 매우 유쾌하다. 두 사람의 대화량이 너무 많아서 자막을 보기 바쁘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활기를 준다. 실제 친구인 롭 라이너 감독과 빌리 크리스털의 평소 대화를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감정이 자라 가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처음엔 서로를 마뜩잖게 여겼던 두 사람이 우연히 재회하면서 친구가 되기로 하고, 그렇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도와주는 친구가 된다. 그러나 친구로만 남기에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너무 매력적이었던 탓일까. 둘은 결국 친구로 남지는 못한다. 다만, 연인이 될 뿐. 설렘을 동반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지만, 즐거운 미소로 감상할 수 있는 질리지 않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