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부터 간간이 색연필, 오일 파스텔로 연습하다 6월부터 본격적으로 수채화를 시작했다. 연필로 스케치한 면을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메꾸는 채색 작업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잠시만 그랬다. 채색 작업을 너무 쉽게 봤다.그저 붓으로 선을 벗어나지 않게 면을 메꾸는 과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선 드로잉은 글의 ‘초고’와 같았다면 채색 작업은 끝이 없는 ‘퇴고’ 과정으로 여겨진다.
좌절의 연속이다.
드로잉과 달리 틀리면 지우개로 감쪽같이 지울 수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검은 흑연색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없는 아무개 색을 직접 만들어야 써야 한다. 30분이면 선긋기 연습도 하고 업로드할 드로잉 작품도 거뜬하게 나왔는데 수채화는 족히 3시간은 넘게 걸리니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버겁다.
한마디로 헤매고 있다.
수시로 까마득한 느낌을 받는다. 변수가 너무 많다. 종이의 재질에 따라, 붓에 따라 그리고 특히 물의 상태에 따라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오는 통에 감을 못 잡고 있다. 비싼 100% 코튼 종이로 바꾸어 보고, 고급 천연 붓으로 바꾸어 칠해 보기도 했다. 심지어 물감 조색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비싼 외제 물감도 샀다. 두 달 동안 사 모은 재료값만 해도 얼추 따져보니 30만 원이 넘는다.
“배움의 중심에 재료 자체를 놓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채색의 어려움을 느끼고 읽게 된 <채색의 기술>의 저자 백남원 선생님의 따끔한 충고에 재료 욕심은 다행히멈추었다.
결국 재능 탓으로 이어졌다.
그림 유튜버들의 그림 시범 동영상을 보면 농담까지 하면서 정말 쉽게 쓱싹 잘도 그린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상의 제목도 ‘초보자를 위한~ ’, ’손쉽게~ ’, ‘누구나 할 수 있는~ ’ 등으로 시작하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절대 그렇게 쉽게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뭐지? 동영상에 낚인 것인가? 아님 타고난 재능 부족 탓인가?
그럼에도 그림이 좋아서 포기가 안 된다.
1년 동안 매일 드로잉 연습작을 올렸던 블로그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초보’라는 단어가 부끄러움이 아니라 ‘용기’였던 시절이 보였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니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무엇이 정석인지 모르니 ‘초보’라는 딱지는 마음대로 할 자유가 보장된 자격증쯤으로 당당하게 여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만큼 노력했으면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누가 지켜보며 검열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삶을 치열한 경쟁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던 삶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실수는 곧 실패이고 성과를 곧 존재의 등급으로 매기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보였다.
헤매면서 힘들었던 마음을 '막 쓰기'로다스렸다. '막 쓰기'는 멘토이신 화서님이 글쓰기의 부담을 없애고 마음 속에 쌓인 낙엽을 걷어내는데 최고의 명약이라며 가르쳐주신 방법이다. 아무 제약없이 마음의 소리를 뱉어내듯 막 써내려가는 글쓰기 기법이다.뭉게뭉게 헤매는 마음들을 매일 아침검열없이 막 써내려가는 과정을 통해서서히 마음이 정화되었다.
고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 방법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생각을 문장으로 구체화하는 과정 자체가 해결 과정이 되었다.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틈을 만들어 주었다.스스로에게 납득이 되니 굳이 해결 방법을찾을 필요가 없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잘 살기 위해서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