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고, 많은 강연과 책에서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다 . 가끔 산책길에서 만난 노을이 의미 있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반복된 일상속에서 의미를 느끼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제법 굵직하게 느낀 경험도 있었다.
팔순이 넘으신 엄마가 분가해 살던 남동생 가족과 집을 합하게 되었는데 집 정리를 못하셔서 도와 드리려고 한국을 방문했다. 엄마는 8남매 중에서 6번째로 태어났고 친정 식구들에 대한 자부심이 실로 대단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정미소를 하고 계셨는데, 사위인 아빠에게도 사업 조언을 자주 하셨다고 은근히 자랑삼아 말씀하시곤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의 친정은 쇠퇴해지고 시댁은 날로 부흥되어 ”복덩어리" 라고 했다고 뿌듯해하시기도 했다.
어쨌든 40년 이상 거주한 집에서 정리의 우선순위를 정하기가 난감해서, 엄마의 의견을 들어보니 꼭 필요한 가구 몇 개와 사진만 남기고 대부분은 정리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머지 가구와 식기, 이불 등은 알고 계신 수양관에 기부했고, 병풍과 그림은 옥션으로 보내기로 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면 처분해준다고 해서 의미 있는 몇점만 남기고 다 보냈는데, 그 후 엄마가 소장했던 그림이 담긴 도록을 보내주셔서 언제든지 보고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되니 정리를 제법 잘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은 엄마가 가지고 싶어 하시던 수십 개의 사진첩이었다. 그 많은 사진첩을 다 가지고 이사 갈 수도 없어서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엄마, 사진을 다 정리해서 파일로 만들어서 언제든지 핸드폰으로 보시고, 사진첩 한 두개 만 놔두고 없애면 어때요? 했더니 아쉬워하시더니,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신다.
일단 파일로 만들 사진이 필요해 하나씩 정리하는데, 엄마가 5살 때 외할머니를 여의고 7살 언니 9살 오빠와 찍은 슬픈 모습의 얼굴도, 새외할머니가 엄마가 불쌍하다고 잘 보살펴준 장면도 고스란히 보였다. 사진을 보며, 엄마는 자식들에게 당신이 못 받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려고 했는데, 과보호한다고 짜증만 내고 벗어나려고 결혼도 빨리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엄마의 꿈 많았고 예뻤던 처녀시절의 사진, 아버지와 달달한 연애하시고 삼남매를 열심히 키우셨던 흔적도 가득했다. 늘 깨끗한 옷을 입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곳을 열심히 데리고 다니셨던 엄마의 의미 있는 시간이 보인다. 서재의 책 사진을 보니 자식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티브이를 없애고 책을 함께 읽으셨던 부모님의 교육열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 많던 사진의 흔적은 엄마가 46세가 되면서 한동안 똑 끊긴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셨던 멋쟁이 아버지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다가 이별하셔서 얼마나 상심했을지 , 사진 없었던 시절의 젊은 엄마의 아픔도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 후 며느리와 사위가 가족이 되어 손자 손녀들의 사진들도 뜨문뜨문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미 많은 그것들을 놓으셨는지 예전의 그 욕심 많고 극성이었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집 정리를 못하는 것은, 모든 것에 추억이 서려 있고,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진첩 정리를 하며 엄마의 청춘과 일생을 보게 됐고, 자식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던,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이해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됐다.
나 또한 지나보낸 모든 시간, 머물렀던 장소, 스쳤던 수많은 만남속에 의미가 있었지만, 김춘수의 꽃처럼, 불러주지 않아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잡동사니처럼 주위에 머물게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의미 있는 삶의 첫 마중물이 글쓰기가 된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 함께 살아갈 모든 것에게 의미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사이좋게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