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을 처음 좋아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대학 입시 실기 곡으로 그를 만났는데 선율이 워낙 아름다워 연습의 고단함도 잠시 잊곤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다양한 음악 중에서도 ‘피아노 협주곡 A단조(Op. 54)’를 유독 아꼈다. 아내 클라라에게 바치는 사랑의 찬가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고받는 호흡이 격정적이면서도 감미로워서다.
그러나 일상의 분주함에 치여, 슈만을 잊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난 주말, 딸이 건넨 음악회 초대장에서 반가운 이름을 다시 보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뉴욕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인 예핌 브론프만(Yefim Bronfman)의 협연이었다. 마치 잊고 지냈던 친한 친구를 우연히 마주친 듯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갑자기 추워진 겨울 날씨에 두툼한 털 옷으로 한껏 치장하고 집을 나섰다. 한겨울 맨해튼의 매서운 공기를 뚫고 도착한 링컨센터는 클래식 애호가들의 열기로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프로그램에는 세곡이 있었는데 그 중 슈만 협주곡은 단연 압권이었다. 클래식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연주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공연이 절정에 달할 무렵, 내가 새삼스러웠던 것은 아름다운 연주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이 듦'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숙련'이라는 시간이 주는 경이로움이었다.
협연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은 거구에 나이 들고 투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무대에 등장한 모습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첫 음이 들리는 순간, 우려는 순식간에 환호로 바뀌었다. 수없이 들었던 익숙한 슈만의 선율이 그의 손끝에서 또 다른 차원의 섬세함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다. 강렬한 터치 속에서도 명료하고 한 음 한 음에 실린 철학적 고뇌가 장내를 압도했다.
그의 나이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예순일곱이었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잣대로 보면 이미 현역에서 물러나 정년을 맞이했을 나이다. 하지만 무대 위 그의 손가락은 그 어느 젊은 피아니스트보다 기민했고, 그의 음악적 해석은 수십 년의 세월이 응축된 듯 묵직했다. 67세라는 숫자는 쇠퇴의 증거가 아니라, 예술적 완성도가 비로소 만개했음을 알리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마침, 우리가 앉은자리가 오케스트라 바로 뒤편이라 단원들의 표정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은빛 머리칼이 성성한 노장 음악가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돋보기를 고쳐 쓰며 악보를 응시하는 첼리스트,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바이올리니스트. 그들은 젊은 단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가슴 벅찬 자극이었다.
그동안 나는 왜 스스로를 재촉하며 조급하게 삶의 현장에서 마침표를 찍으려 했던 걸까. 50대만 되어도 은퇴를 고민하고, 60대에 접어들면 사회적 역할이 다했다는 생각에 지레 뒤로 물러나곤 했다. 하지만 뉴욕 필하모닉의 무대 위에서 '나이'는 결코 걸림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깊은 울림을 내는 고악기처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오케스트라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날 공연을 보며 나는 '숙련(Mastery)'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았다. 기술은 배울 수 있고 체력은 단련할 수 있지만, 깊이 있는 해석은 오직 '시간'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다. 예핌 브론프만의 섬세함은 수만 번의 연습과 수천 번의 무대 경험이 켜켜이 쌓인 결과물일 것이다. 흔히 나이가 들면 감각이 무뎌진다고 생각하지만, 거장의 무대는 그렇지 않았다. 삶의 모든 풍파를 끌어안는 넉넉한 소리에 가까웠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겨울 감성이 가득한 맨해튼의 거리가 유독 풍요롭게 느껴졌다. 나이 듦이 이토록 멋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무언의 응원과 새로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거창한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우리 각자는 자기 삶이라는 무대 위의 연주자다.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또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온 수십 년 세월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내면의 '지혜'와 '노련함'이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여, 이제야 가장 깊은 소리를 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나이 듦이 두렵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고 새로운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불안해서다. 그럴 때마다 67세의 피아니스트가 보여준 노련하고 섬세했던 연주를 떠올려야겠다. 어쩌면 지금이 내 삶의 교향곡을 가장 깊이 있게 연주할 수 있는 '절정기'일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먼지 쌓인 피아노부터 열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