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AI 생활
미국에서 주택에 살면 누구나 반강제로 '맥가이버'가 된다. 수시로 집을 손봐야 할 크고 작은 상황에 스스로 대처해야 해서다. 남편도 한국에서는 못 하나도 못 박았는데 어느새 만능 기술자가 되어버렸다. 뭐 하나 고장 나면 유튜브를 스승 삼아 며칠 밤낮을 끙끙대며 고치곤 했다. 그러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구세주가 나타났다.
얼마 전부터 지하 보일러실 바닥에 물이 찔끔찔끔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난방이 뚝 끊겼다. 어딘가에서 세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처럼 추운 뉴욕의 날씨에 난방이 멈춘다는 건 그야말로 재앙이다. 수리 기사를 부르려니 예약 잡는 데만 며칠, 게다가 살인적인 출장비를 떠올리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실내 온도만큼이나 내 마음도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보던 남편이 잠깐 고민하더니 공구함과 함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하게 제미나이 앱을 켠 남편은 보일러 모델명과 소음 상태, 경고등의 색깔을 마치 의사에게 증상을 말하듯 상세히 입력했다. 그러자 AI는 놀랍게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진단을 내렸다.
"빨간색 밸브 압력이 낮아져서 그래요. 오른쪽으로 두 바퀴만 돌려보세요." 마치 노련한 베테랑 기술자가 옆에서 훈수라도 두는 듯했다. 반신반의하며 밸브를 돌리고 안내대로 따라 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보일러는 다시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편의 얼굴도 환해지고. 추위에 떨며 수백 달러를 날릴 뻔했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남편에게 든든한 '정비공' 친구가 생겼다면, 나에게도 유능한 '사업 파트너'가 생겼다. 처음 '엣시(Etsy)' 샵을 오픈할 때도 AI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지만, 최근에 더 절실한 일이 있었다.
여러 해야 할 일정이 겹쳐 엣시에서 소품 주문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시간은 없고 덜컥 겁부터 났다. '주문이 계속 들어오면 어떡하지? 계정을 삭제해야 하나? 그러기엔 그동안 한 땀 한 땀 쌓아온 별점과 리뷰가 아깝잖아.' 며칠을 전전긍긍하다가,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AI에게 하소연하듯 물었다. "내가 엣시 샵을 하는데, 두 달 정도 쉬어야 할 사정이 생겼어. 가게를 없애지 않고 주문을 안 받는 방법이 있을까?" AI의 답변이 10초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명쾌했다. "그럴 땐 'Vacation Mode(휴가 모드)'를 설정하면 돼요."
아하!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설정 메뉴의 경로를 정확히 알려주고, 내 상황에 딱 맞는 따뜻한 어조의 공지문(Announcement)까지 작성해 주었다. "친애하는 고객님,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두 달간 쉽니다. 더 좋은 작품으로 돌아올게요." AI가 써준, 유려하고 정중한 영어 문장을 공지 사항에 붙이고, 휴가 모드 버튼을 누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며칠을 끙끙 앓았던 고민이 허무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가게는 안전하게 '일시 정지' 되었고, 나는 마음 편히 휴식기를 가지며 미뤄뒀던 일들을 차분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AI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아휴, 이 나이에 또 뭘 배워야 하나?' 싶어 짜증부터 났었다.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이 친구는 뭘 물어봐도 타박하지 않고, 같은 걸 계속 물어봐도 절대 화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특히 한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모르는 것과 마주하는 일이다. 언어도, 시스템도, 문화도 다 다르니까. 그런 일상에서 남편이 보일러를 고치고, 내가 가게 문을 잠시 닫을 수 있었던 것은 "도와줘"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용기뿐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모르는 것도, 어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겁이 나지 않는다. 배우는 게 두렵지 않고, 도움을 청하는 게 부끄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AI는, 자칫 주눅 들 뻔했던 인생의 후반전에 나에게 배달된 가장 신기하고 유쾌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선물을 매일 즐겁게 뜯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