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뉴욕은 몹시 춥다. 예전에는 '이런 날 걷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라며 집안에 머물렀겠지만, 지금은 반사적으로 운동화 끈을 묶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 숨겨진 짜릿한 보상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서는 내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받은 처방전이 어느새 즐거워하는 놀이가 되었음을.
5년 전의 나는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갱년기 증상인지 몸 이곳저곳이 예고 없이 쑤시고, 무엇보다 늘 피곤해서 의욕이 바닥을 쳤다. 그러다 보니 매일의 일상은 태엽 풀린 시계처럼 늘어져만 갔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등 떠밀리듯 동네 체육관에 등록했다. 내 발로 찾아갔기보다는 살기 위해 끌려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금을 내고 퍼스널 트레이닝(PT)을 시작했다. 위협적이고 생소한 운동 기구 사이에서 낯을 가리며 어설프게 훈련받는 내게 코치가 대뜸 한마디했다. “회원님. 근력 운동도 좋지만, 기초 체력이 너무 약하셔요. 일단 오늘부터 집 앞이라도 매일 걸으세요. 제가 매번 체크할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걷기는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처방전이며 해야 할 숙제였다. 비장한 생존 훈련이 담긴.
처음에는 현관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도 멀고 힘든지. 겨우 나가서도 지루함에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고, 돌아오는 길엔 다리가 무거워 투덜거렸다. 쓸데없이 시간도 낭비하는 것 같았다. 한 달쯤 지나자, 시계를 보지 않고도 30분을 걸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하루가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서 서서히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춥거나 덥거나, 바람이 분다는 등 여러 '하지 않을 이유'들로부터 조금씩 해방되어서다. 5년이 흐른 지금, 하루 1시간을 걷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근질거리는 '걷기 예찬론자'가 되었다.
"걷기는 그 자체로 사색과 새로운 경험을 자극하는 신묘한 행위다." 최근 읽은 다비드 르 브르통의 『 걷기예찬 』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 말대로 지난 5년의 걷기는 나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중 으뜸은 자연을 오롯이 느끼게 된 감각의 회복이다. 늘 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풍경들이 비로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봄의 새싹부터 여름의 싱그러움, 가을의 바스락거리는 낙엽까지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무뎌졌던 오감이 제 역할을 되찾았다. 특히 요즘처럼 찬바람이 매서운 날씨엔 걷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추위에 잠시 망설이다가도 두툼한 패딩을 챙겨 입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차갑고 투명한 공기. 그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감각이 깨어나자, 생각도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온갖 불안과 걱정으로 어질러져 있던 마음이 신기하게도 차분하게 정돈되었다.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책상 앞에서 오랫동안 하는 고민보다 잠깐 나가서 걷는 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때도 많았다. 지금은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든든하다.
무엇보다 갱년기의 파고를 넘으며 무기력하게 가라앉았던 몸이 활력을 되찾았다. 어느새 단단해진 근육들은 어디든 데려다줄 준비가 되어 있다. 가끔 시티에 가면, 센트럴파크를 한 바퀴 도는 것도, 맨해튼 구석구석을 걷는 것도 거뜬하다. 5년 전의 나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감각이 깨어나고,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몸이 활력을 찾은 선순환. 이것이 걷기가 준 가장 큰 선물이다.
돌이켜보니 '걷기'는 나에게 가장 강력하고도 다정한 치유였다. 코치의 말에 엉겹결에 시작한 '생존을 위한 처방전'이었지만, 5년의 세월을 지나며 내 인생에 꼭 필요한 '놀이'로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망설여질 때가 있다. 특히 추운 날에는 '오늘 하루쯤이야'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신발 끈을 묶는다. 5년 전처럼 비장하게 가 아니라, 오늘은 어떤 공기가 마중 나올지, 어떤 골목이 새로운 표정을 보여줄지 기대하면서.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내게 주어진 처방전을 따라 기꺼이 즐기리라. ‘길’이라는 넓고 다정한 놀이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