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의 전설처럼, 제주도에서 잠시 쉬었다 가라
타이틀: 이어도의 슬픈 전설처럼/잠시 쉬었다 가라
부제: 이어도의 전설처럼, 제주도에서 잠시 쉬었다 가라
안내말씀: 아래 글은 제주도에 정착한 후, 3년이 흐른 뒤에 쓴 글임을 양지하고 읽어주기 바란다.
그 당시 제주영어교육도시는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도, 부동산 개발이 활발하지도 않았다.
제주도에 살게 되면서 육지에 나가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육지에 마땅히 있을 곳이 없는 나에게는 한 번 나가는 것이 금전적으로 많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에 가는 일은 주로 영국에 있는 시댁에 가기 위해 인천공항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이 스키를 타고 싶다고 해서 서울과 강원도로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그 당시 겨울방학이면 본가로 돌아가 강원도로 스키를 타러 가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딸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엄마, 나도 스키 타고 싶어"라고 말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원도로 1박 2일 스키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딸의 친구들과 부모님들을 만났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울에 갔을 때, 서울이 정말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지하철은 사람들로 빽빽하게 가득 차 있고, 할 일도 볼 것도 많아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우 3년 동안 제주도에 살았는데, 어느새 나는 제주도의 '느린 문화'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의 삶은 서울과 비교하면 확실히 달랐다. 가장 먼저, "빨리빨리"라는 말을 달고 살 필요가 없었다. "천천히 느릿느릿"하는 삶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화에 조금씩 적응했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새롭게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 중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에게는 "조금만 더 살아보세요. 그러면 적응이 될 것이고, 오히려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떠나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라고 조언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천천히 적응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혹시 내가 이어도의 등장인물처럼, 이곳에서의 삶을 보내고 나서 육지로 나가게 된다면, 그때 나는 인간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사고를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살던 사람들이 육지로 나가면 아예 돌아오지 않거나,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설령 적응하더라도, 결국 이곳의 삶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실제로 제주도에 살게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자, 제주영어교육도시를 떠났던 사람들 중 일부는 세상을 돌고 돌아 결국 제주만큼 특별한 곳은 없다고 느껴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면서, 돌아올 계획을 세워 집을 마련한 사람들도 있었다.
1월의 어느 날, 대정읍에 있는 세탁소에 물건을 맡기기 위해 내려갔다.
내가 사는 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내려간다는 생각이 늘 든다.
아침 11시, 찬란한 햇살과 맑은 하늘이 눈부시다.
세탁소에 도착하자, 세탁소 아주머니와 동네 아주머니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은 평화로 경마장 근처에서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해, 올라오는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엉키며 난리가 났다고 한다.
미리 교통을 통제하지 않아서 평화로의 꼭대기 지점인 그곳에서 차들이 엉켜있다고 했다. 한 아주머니는 간신히 되돌아왔다고 하며, 혹시 제주시에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전화해서 나가지 말라고 하라고 전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맑고 푸른 하늘과 햇살로 가득하지만,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은 전혀 다른 세상 같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봤지만, 제주처럼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를 가진 곳은 없을 것 같다.
오늘처럼 극명한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이런 일은 제주에서 자주 일어난다. 평화로의 중반쯤 지나면 먹구름이 잔뜩 끼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도 하고,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1시간 정도 일을 보고 가면, 서귀포는 봄날처럼 따뜻하고 햇살이 쨍쨍하게 비춘다. 반면 제주시는 한겨울 날씨인 경우도 많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남쪽인 서귀포는 온화하고, 제주시 쪽은 추운 겨울 날씨인 경우가 많다.
또한, 한라산은 보는 위치나 계절, 날씨에 따라 항상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에게 한라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인자하면서도 강하게 그들을 보듬어주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라산의 모습은 서귀포 쪽 홈플러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날씨가 좋을 때 한라산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고,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모습은 기이한 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천지연 폭포를 둘러싼 나무들을 보는 느낌과도 비슷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듯한 기이한 모습, 절벽에 붙은 나무들이 마치 뭉게구름처럼 보이는 모습은 오묘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제주의 풍경은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공간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화가 이중섭의 작품에서도 이런 제주 특유의 이국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그의 그림 중에는 바다와 감귤나무 사이에서 사람들이 있는 장면이 있다. 그 그림을 보면 마치 외국의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약간 느릿한 카리브해 지역에서나 볼 법한 풍경 같다. 마치 "너무 힘들게 살지 말고, 잠시 쉬었다 가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