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했을까?
타이틀: 그녀의 선택, 블랙위도우처럼
부제: 그녀는 왜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했을까?
마침내, 5개월 동안의 춥고 을씨년스러웠던 영국의 겨울이 끝나간다. 3월 10일, 마침내 해가 6시 20분에 떠오르고, 5시 50분에 해가 진다. 저번 주 동안 며칠은 최고 기온이 15도, 16도까지 올라갔고, 비도 오지 않아서 파란 하늘과 선명한 봄 햇살이 내리쬐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물들었고,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죽음이 잠식한 듯한 공공임대주택단지가 조금은 괜찮게 보였다. 바로 빛의 힘이다. 침몰해 가는 영국 경제 속에서 짙은 어둠에 가려졌던 곳에 마치 숨통이 트이고, 햇살이 쬐어 축축하던 땅과 공기가 뽀송해지고,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저번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84세의 여자 어르신이 말했다. "날씨가 더운 나라 사람들의 수명이 영국 사람들보다 더 긴 거 알지? 그건 바로 해가 있고 없고라는 말이 있잖아."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5개월 동안 축축했던 땅과 공기가 단 1주일 만에 바싹 말라버린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햇살을 받고 밝아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남자가 나타났다.
저번 주, 집을 나서다가 그 남자가 살던 집 앞마당에서 이웃인 티나와 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티나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그 남자도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들에게 손을 흔든 뒤, 피검사를 위해 GP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나타났다.
내가 알기로, 그 집에 살던 그녀는 어린 자녀 셋을 둔 싱글맘이었고, 그 남자는 40대 초반에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아이들을 함께 키워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봤고, 성인이 된 자녀들이 직장에 나간 후에는 손자녀들까지 보살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친자식은 없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외로움 속에서 이웃들과 더 가까워지려 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닻을 잃은 배처럼, 의지할 곳을 찾아 떠도는 듯이.
그렇게 20년 넘게 함께 살던 동거녀의 집에서, 그는 지난해 12월 초,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 심장병을 앓고 쇠약해진 60대 중반의 나이에 쫓겨났던 그가 다시 나타났다.
12월 5일인가? 아주 추었던 밤 10시경, 거리가 떠나가라고 고성이 들렸다.
그는 차에서 내려 집 안에 있는 그녀에게 소리쳤고, 경찰이 출동한 후 그는 경찰과 몇 마디를 나눈 후, 차를 타고 떠났다. 그 일이 두 번 정도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그 후로 그는 이 거리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쫓겨났을까? Cheating(불륜), 폭력, 마약, 도박… 혹시 그랬을까?
쫓겨난 그는 내가 영국 역이민을 온 후, 처음에는 두려운 존재(Predator)였고, 때로는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심장박동기를 가슴에 단, 언제라도 심장마비로 쓰러질 수 있는 60대 중반의 노인으로서, 결국 그녀에게서 떠나야 했던 존재가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그녀는 정말 블랙위도우처럼 그를 이용하고 버린 걸까? 아니면 오랜 세월 그의 행동을 참고 견디다가 이제야 결단을 내린 걸까?
영국에서는 어린 자녀들을 둔 싱글맘에게 정부에서 주는 혜택이 많다. 남자들이 아이를 낳고 책임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부는 그런 가정을 지원하고 가정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집과 생활비를 제공한다. 물론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영국에서 오랜 시간 살면서 그런 가정을 많이 봐왔다. (시누이가 그런 케이스였음)그런데 가끔은 두 부모가 모두 일하는 워킹 클래스 가정이 싱글맘보다 정부 혜택에서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와 블랙위도우
GP에서 두 병의 피를 뽑은 후, (한국에서는 보통 6~7통을 한꺼번에 뽑아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번에 하지만, 여기는 NHS가 예산이 부족해서 인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티나는 앞마당에서 작은 풀들을 뽑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티나에 의하면, 그는 집에서 쫓겨난 후, 차에서 이틀 정도 잠을 자다가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몇 해 전 심장병 진단을 받아 장애인 등급을 받았고, 그 덕분에 정부로부터 일정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동거녀 역시 그와 함께 생활 지원을 받아왔다고 들었다.
이번 일로 집에서 쫓겨났지만, 장애인 등록 덕분에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빨리 새로운 거처를 배정받을 수 있었던 듯하다. 마치 한국의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는 것처럼, 그 역시 정부의 도움 덕분에 겨우 몸을 의지할 곳을 마련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다행이다. 병든 몸을 기대고 쉴 수 있는 집이 주어졌다. 그나마 길거리에서 추위에 떠는 일은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서, 침대나 소파 같은 생활 필수품들은 모두 채리티숍에서 하나씩 구해 채워가고 있다고 했다. 티나는 그가 큰 사진을 갖고 싶어 해서, 그녀의 남편이 집에 있을 때 티나의 집을 방문할 거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가 쫓겨난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티나는 말했다.
티나: "코니,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게 있어. 3년 전, 코로나가 한창일 때, 그의 동거녀가 나에게 'I don’t need him'이라고 했었어. 참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자기 동거남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마치 물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게 잊히지 않았어. 코니, 너도 이상하지 않니?"
부모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란 티나에게는 이런 표현이 매우 생소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그렇네. 보통 20년 넘게 함께 살면서 자식도 키워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티나: "정말 이상해. 정말 이상해."
티나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실, 그녀는 이곳 사람들과 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티나도, 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갑자기 블랙위도우 거미가 떠올랐다. 필요할 때 사용한 후, 수컷을 먹어버리는 암컷 거미처럼, 그녀는 그런 존재일까?
혹시 그녀는 그가 심장 수술을 받은 후, 이제 더 이상 그가 자신의 삶에서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오랜 세월 동안 그와 함께하며 감당해야 했던 무언가가 있었을까? 그가 심장 수술을 받은 후, 이제는 자신이 돌봐야 할 부담이 더 커질 거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독립하여 손자녀가 생길 때까지 참고 기다려오다, 마침내 자신의 삶을 다시 찾아가기로 결심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매우 영리하고 계산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쩌면 현재 사회에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더 계산적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까? 그가 더 이상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나도 궁금해진다. 부디 그 선택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를 바란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다.
그녀는 정말 블랙위도우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었을까?
구독자님들께,
브런치북 '50대 영국 역이민, 나머지 6개월 적응기' 연재는 30화를 끝으로 잠시 쉬어갑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 한편이 버거워 잠시 숨 고르기를 하려 합니다. 잠시의 쉼 후, 더 나은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