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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11. 2020

하루에 딱 한 줄만 쓸 수 있는 일기장이 있다면?

 여덟 살 꼬마 아이의 하루에 한 줄 쓴 일기장이 있습니다. 처음엔 여덟 살 아이가 쓴 일기인 만큼 딱히 특별한 내용이 없어요. 그러다 가족과 보낸 일상이 담긴 잔잔한 내용에서 도시로 이주한 후 전쟁에 휘말리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1939년 여덟 살 소년이 쓴 일기에는 평화롭던 폴란드가 전쟁에 휩쓸려간 과정이 한 줄씩 적혀 있는데요. 저자는 지금도 살아 있고 80년 간 보관되어 있던 일기장은 젊은 화가와 함께 그림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하루에 딱 한 줄만 쓸 수 있는 일기장이 있다면 말이에요, 하루에 딱 한 줄만 쓴 일기장이 1년, 2년 지나 10년, 20년 동안 모았다면 어떤 내용이 가장 많이 있을까요?

 10대든 20대든, 나이가 들어 30, 40, 50 되어도 그때를 사는 동안 일기장을 쓴다면 어떤 한 줄을 가장 많이 적었을까요?

 일기를 써보지 않은 지금, 지난 숱한 세월 동안 내 인생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10대 때에는 '학교 갔다 학원 들러 집에 왔다. 그리고 잤다'가 대부분이겠죠. 가끔 '성적이 잘 나왔다' 혹은 '성적이 쓰레기다' 정도?

20대 때에는 '학교 갔다. 취업 준비하러 학원 갔다. 집에 왔다.' 남자 같으면 '2년 동안 군대 있었다'.

30대 때에는 '회사 갔다. 열심히 일했다. 집에 왔다' 그리고 가끔 '술 한 잔 했다.'

40대 때에는 '회사 갔다. 안 잘리기 위해 애썼다. 집에 왔다.' 그리고 '애들이 말을 지독하게 안 듣는다.'

50대 때에는 '회사 갔다. 아직도 붙어 있어 신기하다. 집에 왔다.' 그리곤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그 말고는요? 60대 때에는? 70대, 80대, 90대 혹시 100세 때는 무슨 기억이 남아 있을까요?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요?

어느덧 벌써 백세 인생 절반을 살았습니다. 내 인생의 아무 기록이 없는 지금, 애써 지난 일을 떠올려보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허투루 쓰면 싱거운 내용뿐일 테고 며칠 지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지만 조금만 신경 쓴다면 매일이 다른 하루가 한 줄에 담깁니다.

'학교 갔다 학원 갔지만 오늘은 성적이 잘 나왔다, 부모가 기뻐했다, 자신감이 생겼다'라는 내용을 추가하고

'취업 준비하러 학원 갔더니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와 같은 즐거운 만남도 적고

'회사 갔다. 열심히 일했지만 오늘은 힘들었다. 아이의 손편지에 없던 힘이 생겼다'처럼 흐뭇한 기억도 남기고.

'안 잘리기 위해 애썼다. 잘 나가는 친구가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다' 같은 충격적인 소식에 인생무상을 느낀 일도, '회사에 갔다. 신기하지만 아직도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음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마음도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어제나 별반 차이 없는 오늘이 대부분이지만, 매일매일이 그저 그런 하루로 보이지만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일은 꽤 많았을 거예요.

1월의 첫날은 늘 새해 소망을 빌며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2월은 다른 달보다 짧아 적게 일하고 받은 월급날이 기분 좋았잖아요.

3월에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반가워 산으로 들로 꽃구경을 가고,

4월을 시작하는 만우절에 하얀 거짓말로 장난도 치며 웃기도 했습니다.

5월에 있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기쁜 만큼 허리가 휘었지만 보람도 느꼈고요.

6월,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지긋지긋한 장마에 맑은 하늘을 그리워했을 테죠.

7월은 휴가 계획이다, 바캉스에 들뜨고

8월은 열대야에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잠 못 이룬 밤이 짜증스러웠고요.

9월이 오면 신선한 가을바람과 높은 하늘,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시인이 되어보지 않았나요?

10월은 노는 날이 많고 날도 좋은 가을을 만끽하느라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고요.

11월, 공휴일 하나 없는 달력이 심심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11월을 살고 있어요.

12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따끈한 호빵을 먹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겠죠.


소중한 만남, 합격의 기쁨, 첫 출근의 설렘, 새 생명의 탄생, 승진 같은 즐거운 일도,

사람에 실망하고 패배의 쓴잔을 마신 일, 매너리즘의 일상, 때로는 지겨운 사랑, 뼈아픈 아픔, 하늘이 무너지는 상실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한 줄 한 줄 담겨 인생의 발자취로 기록됩니다. 내 생애 나만의 역사책이기도 하고요.  




오늘은 딱 한 줄 적는 일기에 어떤 이야기로 채워볼까요?

어떤 일로 크게 웃었는지에 대해서? 진한 감성을 불러온 진한 커피 한 잔에 대해서?

아님 얼굴 찌푸린 관계에 대한 반성?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고민들?

뜻대로 풀리지 않는 푸념들, 예상치도 못한 행운, 반가운 만남 같은 소소한 개인적인 일상부터 판데믹 코로나, 대형 사고의 안타까움, 간혹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의 행태를 보고 느낀 점도 적어봅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라 적을 게 없다고 단정 지으면 아무렇게나 쓰고 말겠지만,

어떤 한 줄을 남길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진다면 지루한 일상도 조금은 더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단 한 줄의 글이 충만할수록 밋밋한 하루는 생기를 받고 한 달, 일 년이 달라질 거고요.

먼 훗날 오늘을 돌아볼 때 그래도 헛되이, 생각 없이 살지 않았구나 스스로 위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하루에 딱 한 줄만 쓸 수 있는 일기장엔 무슨 얘기를 쓰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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