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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10. 2020

사지(死地)에서 살아남기, 생존 의지

 ‘삐릿 삐릿, 삐릿 삐릿’ 얼마 후 '삐릿 삐릿, 삐릿 삐릿'

 5분마다 울리는 알람 소리를 몇 번 듣고서도 침대에서 뒤척입니다. 마지못해 일어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니까요.


 거울 속에 한 남자가 서있습니다.

 퀭한 눈, 나사가 풀린 듯한 눈동자, 부은 얼굴, 까칠한 피부에 처진 주름. 의욕과는 담을 쌓은 표정입니다.

 우람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봐줄 만했던 몸매는 근육을 찾아볼 수 없고 살은 몸 중심으로 모여있나 봐요. 불룩 튀어나와 축 처진 뱃살은 가느다란 다리가 힘겹게 떠받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어디선가 본 듯한 외양입니다.

 '뱃살은 인격이라는데..' 스스로 위로하지만 몰골은 영락없는 E.T를 닮았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에 부스스한 얼굴, 게다가 새들이 집을 지은 머리, 이 모든 걸 정리하는 데는 10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남자라서 가능한 몇 안 되는 편한 점이기도 하죠.



  

 다들 바삐 움직이는 출근길. 침대에서 뒹굴고 외모를 비하하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안 하던 전력질주를 합니다. 사무실로 가까스로 골인. 오늘도 이 자리를 뺏기지 않고 지켜냈습니다. 커다란 건물 안에 유일하게 마음대로 앉을 수 있는, 생존을 확인하는 내 자리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의자, 주인처럼 세파에 시달려 낡아빠진 의자. 하지만 이 자리가 생존터이자 최후의 보루입니다.


 자신만만했던 젊은 날의 패기는 살아남기 위해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입사했지만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다 보니 점점 숙여요. 그러다 요즘은 바짝 엎드립니다. 힘차게 앞서 달리다가 '어? 이 길이 아닌가베' 하는 순간 이 자리는 날아가 버릴지 모르니까요.


 생사의 칼을 쥐고 있는 상사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래요, 예스맨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서지 않습니다. 괜히 오버했다가 생존에 차질이 생길까 싶어 한 발은 살며시 물러나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 부당함을 겪으면 속이 상합니다. 그럴 때는 크게 심호흡을 해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비장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꾸~욱' 참습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비굴함이지만 이또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니까요.


 하루가 다르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보며 생존 위협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뭐라도 해야겠다'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야지'라는 다짐이 생존 의지를 자극합니다. 머릿속은 '해야지, 해야지'가 메아리치고 오늘부터 당장 나를 위해 투자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마치고 집으로 무사귀환했습니다. 환한 대낮에 '뭔가를 해야지' 하던 다짐은 어둠 속에 묻히고 TV와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운동이라도 할까?' 나가려고 하니 좀 귀찮아요. '조그만 있다가 나가자'며 잠시 미루고요. 막상 나가려니 찬바람이 씽씽 불어대니 추워요.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회사에 민폐가 될 테니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휴식을 선택합니다.

 '그럼 뭐 하지? 영어라도 공부할까?' 스마트폰을 켜서 영어회화 앱에 들어갑니다. 열심히 듣습니다. 꽤 오랜 시간 한 것 같은데 달랑 10분 지났네요. 슬슬 지겨워집니다. 때마침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한창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팀은 이미 보따리를 싸고 없습니다. 게임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지만 흥미가 나지 않네요.


 TV는 신나게 떠들어 대지만 마음은 허전합니다. 무언가 빠뜨린 느낌이 들어요.  본능적으로 냉장고 문을 엽니다. 맥주 한 캔을 꺼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땁니다. 한 모금 두 모금 꿀꺽꿀꺽 들이킵니다. 목으로 넘어가는 시원함이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줍니다. 변함없는 명언 '그래. 이 맛이야.'가 절로 나오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봤다가 유튜브에 들어갔다가 SNS를 여기저기 배회를 합니다. 밤이 점점 깊어갑니다.


 공부도 하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이유도 잘 아는데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요. '내일부터는 꼭 해야지'하며 어제도, 1주일 전에도 아니 몇 달 전에도 했던 결심을 되풀이만 합니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 내일도 살아남기 위해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잠이 들 듯 말 듯 꿈나라로 들어가려는 찰나

"위잉잉, 위~잉"

얼굴 주위에서 점점 커졌다가 작아지는 낯익은 소리가 들려요.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지난여름 쉴 새 없이 나를 공격했던 녀석의 힘찬 부활의 날갯짓이었습니다.

'뭐야? 모기야? 이 겨울에 뭔 모기?? 오늘이 올 들어 가장 춥다던데?'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불을 켜고 이 녀석이 어디 있는지 찾습니다. 잠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개 이맘때 모기들은 날아다니는 것도 비실비실하고 히바리도 없어 쉽게 잡을 수 있는데 이 녀석은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여름이 끝났다고 집어넣은 에프 킬러를 꺼내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뿌렸습니다.

‘어딘가 숨었을까?’ 일단 소리 없이 조용합니다.

‘잠잠한 걸 보니 죽었겠지?’ 안심을 하고요.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들 뻔하다 깨서 그런지 뒤척입니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듭니다. 문득 ‘이 놈의 모기가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남았을까?’ 궁금합니다. 신기하기도 하고요.


 '독한 놈….'

 활동할 계절은 한참 지났습니다. 옷 한 벌로는 추워 카디건도 꺼내 입었는데, 이 녀석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엄동설한에도 보란 듯이 생존하고 있어요. 사지(死地)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강해져 돌아온 느낌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버티기에 급급한 내 인생에 비해,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를 녀석은 죽을 땐 죽더라도 반드시 먹고 말겠다는 강력한 생존 의지가 있었습니다.

 '해야지, 해야지' 하다 어영부영 세월을 축내는 나와 달리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녀석이 참 대단합니다. '저런 의지라면 못할 일이 없겠다'는 부러움이라고 할까요.

녀석의 생존 의지가 나한테 꼭 필요한 의지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일 거예요.


 에프 킬러를 난사한 후 더 이상 위잉 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목표 달성 직전에서 좌절하며 생을 마감했을 녀석이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후의 만찬을 허락할 걸 그랬나’하는 일말의 동정심도 일고요.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생존을 위해 나서야 하는데 피곤합니다. 어제 잠을 설쳐서인지 비몽사몽이고요. 날씨가 쌀쌀해 옷을 두 겹 입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팔꿈치 부위가 가려워요. 껴입은 옷 때문에 손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가려워 옷을 벗어 팔꿈치를 봤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벌겋게 부풀어 오른 자국. 생존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녀석의 마지막 흔적이었습니다.

'대단한 놈'


 죽을 땐 죽더라도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해내는 녀석, 어쩌면 최후의 만찬을 즐기면서 여한 없이 눈을 감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일개 모기의 생존 의지에 경외감이 듭니다.

 '생존 의지란 이런 것이다' 라며 단 하루를 살아도 마치 나처럼 해봐라고 한수 가르쳐준 것 같습니다.


자꾸만 가려운 팔꿈치를 긁으며 집을 나섭니다. 순간 뇌리를 강하게 스치는 생각

'왠지.. 오늘도 살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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