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이었습니다. 마트 근처를 지나는데 마트 옆 도로가에서 할머니 한 분이 과일을 팔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잔뜩 웅크리고 앉아 어느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요. 무엇을 그리 쳐다보시나 싶어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자판 위에 놓인 사과에 눈길이 머뭅니다. 알이 굵고 빨간 사과였어요.
여름도 이제 끝자락의 끝입니다. 낮동안 잠시 더위가 반짝할 뿐 아침저녁으론 이미 선선하다 못해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가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과일, 사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과. 어릴 때 동화 속에 처음 접했던 과일 중 하나가 사과일 거예요.
다들 아시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에서 기막힌 반전으로 해피엔드로 끝나게 한 역할은 단연 사과입니다. 백설공주가 사과 한입 먹고 인생이 역전한 스토리이니까요.
영어책을 처음 접할 때 A, B, C를 배웁니다. 알파벳을 조합하며 단어를 공부합니다. 한글 이름 과일 중에서 맨 처음 영어로 배우는 과일은 사과이지 않을까 싶어요. 애플~ 애플~ 하면서요. 바나나와 오렌지는 영어 이름이잖아요.
세상을 바꾼 세 가지 사과가 있대요. 사과가 인류의 역사를 세 번 바꿨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사과는 이브의 사과입니다.
조물주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아담과 이브를 흙으로 빚어지으셨죠. 둘이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합니다. 단 동산 한가운데 있는 사과는 절대 먹지 마라고 당부하면서요. 얼마 뒤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가 사과를 따먹습니다. 혼자 먹고 나니 꺼림칙해서 바가지를 긁어 아담도 먹게 합니다. 결론은 아시다시피 사과 한입 먹었다고 동산에서 쫓겨나고 남자는 평생 일하는 수고를, 여자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게 되죠.
그러고 보면 조물주도 짓궂은 것 같습니다. 그냥 행복하게 살게 놔둘 것인지, 유혹에 약한 인간인 걸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애당초 선악을 아는 사과를 놔주지 않았다면 비좁은 지구 위에서 싸울 필요도 없이 모든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두 번째 사과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입니다.
당시 유럽에는 흑사병이 유행하여 지금처럼 어디에도 못 가고 집에만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루는 뉴턴이 집 뜰 앞에 앉아 있는데 하필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졌다네요. 사과에 맞아서 짜증이 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땅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왜 물체는 위나 옆이 아니라 항상 아래로만 떨어지는 걸까?’라는 고민을 합니다. 고민 끝에 만유인력의 법칙 즉, '우주에서 질량을 갖는 모든 물체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중력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 만유인력의 법칙은 과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됩니다.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과 블랙홀의 대가 스티븐 호킹 박사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을 정도이니까요.
세 번째 사과는 폴 세잔이 그린 사과입니다.
폴 세잔은 후기 인상파의 대표 작가로 사과와 산만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40년 동안 폴 세잔의 변함없는 그림의 모델은 사과였습니다. '나는 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를 그리고 싶다' 라며 하나의 사과가 가진 모든 빛깔과 형태, 하나의 사과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든 모습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전통적인 원근법을 탈피하여 다양한 각도로, 사물이 가진 본질에 충실한 결과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피카소가 폴 세잔에 대해 이렇게 칭송했습니다. "세잔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다"라고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가지 사과, 그 이후에도 사과는 인류를 바꾸고 있습니다.
먹는 사과는 아니지만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애플을 4번째 사과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많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평소에 사과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사과 과수원을 다녀온 뒤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하죠.
변화와 혁신의 대명사인 애플, 스티브 잡스는 기술(Technology)과 인문학(Liberal Arts)을 접목하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해야만 심금을 울리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과는 스토리텔링의 대명사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91년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강한 태풍으로 사과 농사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들 망연자실하며 살길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있던 한 농부가 모진 태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지에 달려있는 사과를 보며 기막힌 생각을 해냅니다.
“이 거센 비바람을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 사과야말로 합격의 상징이다. 이 사과를 먹으면 시험에 꼭 붙는다.” 이른바 합격사과가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처럼 입시가 치열한 일본에서 평소보다 10배가 넘는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사과는 우리 인류에게 동화, 종교, 과학, 예술, IT, 스토리텔링에 이르기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과일입니다.
가게 앞에 할머니가 쳐다보고 계신 사과를 샀습니다. 한입 먹어 보라며 깎아주는 사과는 아주 달고 맛있었습니다. 사과를 담아주시는 할머니 표정이 편안해집니다. 안 팔렸으면 버려야 했을지 모를 걱정을 덜어서일까요?
봉지에 들어있는 사과를 보며 대체 이 녀석들은 어떻게 거센 비와 태풍을 뚫고 세상에 나왔을까 궁금해집니다.
올여름은 여름다운 여름이 아니었잖아요. 두 달 가까이 장마가 계속되어 하늘은 죄다 흑백 TV 보는 마냥 흐렸는데 게다가 하루 걸러 하루 태풍이 몰아쳤던 혼돈의 시간이었는데 어떻게 버텼을까요?
이 녀석들이 이렇게 영글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몰아치는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썼겠다 싶었습니다.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도, 제4의 사과 애플도, 합격사과도 아닌 평범한 일개 사과이지만 내 손에 쥔 이 사과도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없습니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고 살아남았으니까요.
노을 진 가을 하늘이 무척 이쁩니다. 흑백 TV만 보던 녀석이 이제 컬러 TV를 보듯 가을 하늘을 만끽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