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 메멘토모리
인간은 동물입니다. 자칭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죠. 근데 지구 상의 그 어떤 동물도 인간이 사회적인지 아닌지 1도 관심 없습니다. 그 어떤 동식물도 이성이 뭔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분명 이성입니다. 이성이 있기에 앞날을 예상도 하고요. 미리 대비도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 해서는 안될 것을 구분합니다. 해서는 안 되는데 몰래 했다가는 맞아 죽을 일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아프리카 드넓은 초원에 임팔라 무리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조금씩, 조심스럽게 사자 한 마리가 다가옵니다. 임팔라들은 사자가 오는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네요. 한가로이 풀을 뜯다가 뭐가 신난 지 깡충깡충 뜁니다. 암컷을 차지하려고 수컷 두 마리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고요. 조금 있으면 사자의 밥이 될지 모르는데 풀을 뜯고 장난을 치고 싸우는 걸 보면 지금 이 순간은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듯합니다. 이 초원엔 사자뿐만 아니라 표범, 하이에나 같은 포식자들이 득실거리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사자가 어디선가 튀어나올 지도, 치타가 쏜살같이 달려올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봐도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마치 아무 생각 없어 보입니다.
몸을 숨긴 채 서서히 접근하던 사자가 목표물을 정했는지 힘껏 달리기 시작합니다. 풀을 뜯고, 장난치고, 치열하게 싸우던 임팔라들은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일제히 도망을 칩니다.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싸웠던 수컷이 지쳤는지 너무나 허망하게 사자의 밥이 됩니다. 동료를 잃었는데 분개하는 임팔라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자리를 옮겨 언제 그랬냐 듯 한가로이 풀을 뜯습니다. 너무 달려 배가 고픈가 봅니다.
만약 우리가 저 초원에 산다면? 사자가 어디에 있을지, 하이에나가 언제 덮칠지 조마조마하고 있겠죠. 밥 먹다가 혹시나 싶어 사방을 둘러보고, 물 마시다가 갑자기 무서움이 엄습해서 주위를 살피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잡고 싸울 태세를 갖추기도 하고요. 이렇게 살다가는 제 명에 죽기는 글렸지 싶습니다.
동물은 지금 순간만을 즐깁니다. 임팔라들은 다시 그 초원으로 갑니다. 사자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하이에나가 숨어 있을 수도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제처럼 맛있게 풀을 뜯고, 친구와 실컷 장난을 치며 뛰어놀고, 마음에 드는 암컷과 짝짓기를 위해 처절하게 싸웁니다.
만약 신이 임팔라에게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움을 예상할 능력을 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임팔라가 초원에서 마음 편히 풀을 뜯을 수 있을까요? 동료와 재미있게 장난치며 뛰어놀 수 있을까요? '짝짓기는 무슨,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오도 가도 못하고 걱정하며 불안에 떨다 제 풀에 지쳐 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입니다. 앞날을 대비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생각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현재 살면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끊임없이 개선하며 생존해왔고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는 고민과 걱정이 정도를 지나칠 때입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침이 주체할 수 없는 비만을 만듭니다.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는 욕심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을 유발하고요. 성과를 더 내려는 욕망이 지나치면 몸이 상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 싶어 불안하고, 안 되면 어떡하나 미리 걱정부터 합니다. 정도가 심해지면 1년 365일 노심초사로 보냅니다.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소중한 삶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도'에 대해 궁금한 중생이 노승에게 질문을 합니다.
"스님도 도를 닦고 계십니까?"
"늘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개나 소나 도를 닦을 수 있겠네요? 도가 그리 쉬운 겁니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고, 잠잘 때는 잠은 안 자고 이런저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정말 그러지 않나요? 시험 걱정으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책을 보다 소화불량에 시달립니다. 자야 하는데 내일 회사 일을 생각하면 잠들지 못해 뜬눈으로 지새우고요. 낮에 분한 일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이불 킥을 수십 번 날립니다. 잘 먹고 잘 자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엉망이 됩니다.
며칠 동안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하다가 오랜만에 일찍 들어왔습니다. 집에 키우는 강아지 녀석이 나를 엄청 반겨줍니다.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바보같이 오줌도 찔금 쌉니다. 놀자고 다리를 끌어당기고 안아달라며 두 발로 서서 애처로운 눈빛을 날립니다. 앉아 있으면 놀아달라고 내 품으로 파고 들어오고요, 한동안 집 안에만 있어서 갑갑했는지 자꾸 나가자고 보챕니다. 사료를 줘도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치근대도 움직임이 없자 구석으로 돌아갑니다. 실망했는지 앞발에 턱을 괸 채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세상 다 포기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산책할 때 맬 목줄을 찾습니다. 내 손에 목줄이 쥐어진 걸 본 순간 다시 발광을 합니다. 아까처럼 내 주위를 빙글빙글 수십 바퀴를 돌다가 목줄을 얼른 해달라며 드러눕기까지 합니다. 빨리 하라고 재촉을 하고요. 목줄을 매면 지가 앞장을 서서 대문으로 나섭니다.
밖으로 나오면 뭐가 신이 났는지 여기저기 코를 킁킁거리며 혀를 내밀고 헤헤거립니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면 만족스러운 듯 지 집에 들어가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잡니다. 사료도 이미 깨끗이 비웠습니다.
배고플 때는 밥만 먹습니다. 나가 놀 때는 즐겁게 놀고 잘 때는 세상모르게 잡니다.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한 원망도 없고, 내일 주인이 변심해서 개장수에게 팔려가지 않을까 따위의 걱정도 만들어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행복할 뿐입니다.
인간인 내가 이 녀석보다 나은 삶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으며 걱정 없이 사는 이 녀석은 전생에 주인이라도 구한 걸까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늘 걱정에 시달리는 나 자신을 보면 전생에도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지 싶습니다. 내가 주인인데 자꾸 이 녀석이 부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뛰어들어 해결할 수 있는 걱정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뛰어들면 됩니다. 그러나 당장 해야 할 것이 없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면 오늘은 생각하지 마세요. 어찌할 수 없는 지난날의 후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불안, 일어날지 안 날지도 모를 걱정으로 한숨 쉬며 보낸 날이 비단 오늘뿐만은 아니지 않나요?
아모르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모르파티와 더불어 메멘토 모리는 '내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고요. 언젠가는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 그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이 내가 살아 있는 가장 늙은 날이지만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히 살 것처럼 걱정을 하며 불안에 떱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랑하고 행복해도 모자란 인생인데 가장 젊은 날을 걱정으로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내일 일을 위해 미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고 쓰여 있듯이 오늘은 오늘을 즐겨야겠습니다.
행복은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거나 연연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확실치도 않은 미래를 위해 쓸데없는 힘을 쏟지 않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내는 것이 행복입니다.
거실 구석에서 잠이 든 강아지 녀석을 쳐다봅니다. 자다가 잠꼬대를 하며 웃는 것 같아요. 오늘 신나게 뛰어다닌 꿈을 꾸는지, 내일도 주인과 행복하게 산책하는 꿈을 꾸고 있나 봅니다. 하긴 이제 부를 때도 강아지가 아닌 가족처럼 더불어 함께 산다는 의미로 반려견이라고 해야죠. 반려견 이 녀석을 보며 진정한 행복에 대해 한 수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