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이야기
비가 내립니다. 촉촉이 대지를 적시는 시원함보다 떨어지는 빗줄기에 왠지 센티멘털해집니다. 마음도 덩달아 심란해지고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누군가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비 오는 날'하면 떠오르는 음식, 당연히 막걸리에 파전이니까요. 막걸리 한 잔에 파전 한 입이면 꿀꿀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습니다.
무더운 여름, 찜통더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이미 옷은 흠뻑 젖은 지 오래, 내리쬐는 뙤약볕에 잠시만 서있어도 온몸이 타들어갈 듯한 폭염에 휩싸입니다.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먹거리가 간절합니다. 무더운 여름, 빠질 수 없는 음식은 뭐니 해도 냉면이죠. 얼음이 둥둥 떠있는 냉면 한 젓가락을 목에 넘기는 순간 더위는 싹 가십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엉망입니다. 감기 기운으로 몸이 더 처집니다. 먹긴 먹어야 하는데 딱히 땡기는 음식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타지에서 혼자 지낼 때 아프면 서럽기까지 합니다. 입맛은 없는데 그래도 억지로 먹어야만 할 때 문득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생각납니다. 특출 난 음식도 아닌데 엄마 손맛이 있으면 한결 나을 것 같아 눈물이 핑 돕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사람도 많아지고 먹고살 만한 세상이 되어 먹거리도 다양해졌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먹고사는 게 넉넉지 않았습니다. 쌀이 모자라 분식을 장려했을 정도이니까요.
요즘은 처음 들어보는 음식 이름이 부지기수이고, 잘 알려진 음식끼리 조합해서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합니다. 김밥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떡볶이 하나도 여러 이름이 붙어 출시되니 뭘 먹을까 메뉴 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외식할 수 있는 식당만 해도 셀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배달음식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음식들이 있지만 이래저래 다 따져봐도 집밥이 최고입니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매일 집밥을 먹으니까 가끔 외식도 하고 싶어지고, 막걸리니 파전이니 냉면 같은 음식이 땡길 때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집밥처럼 나오는 식당이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어도 사람들이 꾸준히 찾습니다.
오랫동안 자취를 하거나 타지에서 사회생활을 하면 그리워지는 집밥, 특히 군에 입대한 장병들이 항상 집밥과 더불어 집밥 해주는 사람, 엄마가 더욱 보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밖에 계속 나가 있다가 오랜만에 집밥을 먹으면 흔한 음식인데도 입맛이 살아나는 신기한 마술을 경험해 보시지 않았나요? 집밥은 부모의 사랑과 가정의 따뜻함이 담긴 음식이니까요.
근데 국내 기준에 의하면 본인이 직접 만든 음식은 집밥이라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우리의 어머니들은 먹을 수 없는 미지의 음식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집밥은 자기가 만든다는 의미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차려 놓고 기다리는 정성이 더 담겨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엄마들도 가끔은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집밥을 차리는 정성에는 노동이나 다름없는 수고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집밥하면 고생하신 엄마부터 생각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집밥 타령하는 건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먹어온 밥이 에너지의 원천이요, 삶의 버팀목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인 맛은 고집이 세서 웬만한 맛으로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히들 밥심으로 산다고 하듯이 내공이 되어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내 몸과 마음을 지켜준 집밥, 잘 먹고 힘을 내는 게 음식에 대한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밥, 가족을 연상시키는 집밥, 요란하지 않으면서 음식 본연의 맛 그대로 간직한 집밥. 말만 들어도 친숙하고 편안해지는 감성이 담겨 있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 본의 아니게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기도 하지만 그래도 집밥하면 사랑입니다.
처음에는 특별한 음식이 좋은 거라고 여겼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집밥이 그리워집니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술 같은 사랑이 내 마음속에 늘 있으니까요.
오늘도 집밥 타령하는 남편,
집밥이 지겹다고 하는 아이,
나도 집밥을 먹고 싶다는 아내.
오늘 저녁은 정성과 노동을 담아 온 식구가 함께 손끝의 마술을 부려보는 건 어떨까요? 서로를 위해서 말이죠.
집밥은 변치 말아야 할 사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