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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May 18. 2021

아이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건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닙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아버지, 어머니, 서너 명의 형제들이 한집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셨고, 어머니는 아이들 도시락을 매일 싸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형제들끼리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요즘은 한집에 많아야 아이는 두 명이고요, 외동인 가정도 흔합니다. 아이가 외로울까 봐, 정서에 좋다면서 반려견, 반려묘가 형제들 자리를 대신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데 주저했던 아빠는 자신이 퇴근하면 가장 먼저, 가장 열렬히 맞아주는 강아지에 감동을 받아 반려동물 예찬론자가 됩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개나 고양이와 놀고 싶을 때는 이런 행동을 보입니다. 개나 고양이를 부릅니다. 녀석들은 혼자 있고 싶은지 불러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 있나 찾으러 갑니다. 놀기 귀찮아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하면 어른들은 개나 고양이를 자기 눈높이로 번쩍 들어 올립니다. 그러고는 대화를 시도하고 끊임없는 구애를 해보지만 귀찮은 녀석들은 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다른 행동을 합니다. 개나 고양이를 부릅니다. 역시나 대답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녀석들은 구석에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개나 고양이와 놀고 싶으면 바닥에 엎드려 걔네들과 눈을 맞춥니다. 개나 고양이의 눈높이로 자기를 낮추고 장난을 겁니다. 그러면 귀찮아하던 녀석들이 감동을 먹었는지 앞발을 내밀며 관심을 보입니다.


 인간관계에 빠지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눈높이를 맞추라고 합니다. 내 입장만 내세우지 말고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도 생각해 보는 노력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피치 못할 사정을 이해할 수도 있고 미처 고려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생긴 오해도 풀 수 있다고 하면서요.


 성인 대 성인으로 눈높이가 같은 어른들끼리는 상대방이 독립된 인격체임을 인정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서로 다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한 말과 행동으로 상대가 상처 받지 않을까 눈치를 보기도 하고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었다면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이야기하거나 내 입장을 설명해 잘못을 바로잡습니다.


 하나의 인격체를 인정하면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오해 없이 내 감정을 전달하려고 하고 그 사람의 감정도 읽으려고 애를 씁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라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고 누구보다 아이를 잘 아는 부모이기에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 화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참아야지' 하면서도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드러냅니다. 자랄수록 말 좀 잘 들어주면 좋으련만 오히려 말대꾸를 하고 반항을 합니다. 아이가 반항하며 말대꾸를 하면 부모는 충격에 휩싸입니다. 행여 비뚤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들고요. 내가 이러려고 이 녀석을 키우는가 싶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급한 엄마는 옆집 아이에게 눈을 돌리고 현명한 엄마는 내 아이에게 눈을 맞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갓난아이를 키울 때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습니까? 행여나 아프기라도 하면 노심초사 밤을 지새웠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다른 아이보다 늦게 걸을까 봐, 기저귀를 늦게 뗄까 봐, 말을 늦게 할까 봐 조마조마하며 보낸 시간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그야말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었습니다. 혹시 지금도 다급해서 옆집 아이는 뭐하나 목을 빼고 눈을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아이의 눈높이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껏해야 십 년 남짓 산 녀석이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알까 싶습니다만 반항하며 말대꾸를 한다는 건 나름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는 표현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용기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의존하는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앞날은 창창하지만 아직은 성장 중이기에 아이의 눈높이는 어른이 맞추어 줘야 눈을 보고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니까요.


 아이의 입장이 되어보면 해맑은 얼굴에도 슬픔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에도 분노와 질투가 담겨 있을 수 있고요.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자존심도 서운함도 들어있습니다. 아이도 인격이 있기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감정들은 부모를 포함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이로서가 아닌 미성숙하지만 인격체를 가진 사람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발걸음을 맞춰서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만 그러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같은 성인끼리가 아니라 고집을 부리고, 툭하면 '싫어, 안 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과 걸어가려면 어떤 때는 속이 탑니다. 부글부글 끓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걷는 거고요, 독립된 인격체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부모는 조금 늦춰주는 여유와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품 안의 자식이니까 ‘아이의 눈높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잘 안다고 당연시했습니다.

 내 아이의 마음을 진심으로 잘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의 눈높이로 대하면서도 아이의 눈높이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닌지.

 아이의 감정을 다 안다고 착각하고 나도 모르게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는 척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아이가 개나 고양이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엎드립니다. 그건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나도 기꺼이 네발로 기어서 개나 고양이가 되어보는 배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존재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라지 않고 또 억지를 부리지 않고 나를 그에게 맞춰가는 마음, 그것이 교감이자 나란히 걷는 사랑입니다.


 아이의 눈높이에 몸을 낮추는 자세, 아이와 교감하는 배려입니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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