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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Sep 24. 2021

기억과 망각 사이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눕니다.

 아이들 사는 형편, 먼 친척 근황, 먼저 떠난 지인과 남은 가족들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슬픈 소식은 같이 탄식하고 손주들 이야기가 나오면 신이 나서 웃고 떠들곤 합니다. 그러다 서로 기억이 다르면 내가 맞니 네가 틀리니 티격태격 다툽니다. 한바탕 열을 내서 그런지 집안이 덥습니다. 목도 마르고요.

 할아버지는 시원하게 환기를 시키려고 창가로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위해 시원한 냉수 한잔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자신이 뭐 하려 했는지 깜빡하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그냥 서 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연 할머니는 냉장고를 왜 열었는지 몰라 넋이 나간 듯 가만히 서 있습니다.

 잠시 정지 화면, 누가누가 기억이 빨리 돌아오나, 뭐가 뭐가 먼저 생각이 날까. 마치 내기하는 것 같습니다.  




 기억이란 감각이나 경험들을 뇌가 받아들여 정보로 간직하고 다시 떠올려내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 그 자체, 관점에 따라서는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정체성 그 자체가 기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억과 망각 사이를 늘 오가며 살아갑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하루에도 무수히 기억이 쌓이고 또 무수히 망각을 합니다. 깜빡깜빡하는 건망증도 그렇고, 열심히 쓰고 외워도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기억하면 망각하고, 외우면 잊어버리고, 그러다 다시 생각나거나 영영 기억에서 사라지곤 합니다. 책과는 담을 쌓고 산 사람이나 한평생을 책 속에 파묻혀 연구하며 산 사람도 마찬가지, 그래서 기억과 망각은 누구에게나 있기에 어쩌면 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기억과 망각,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기억과 망각, 생존하는데 어느 것이 더 유리할까요?

 흔히들 기억이 망각보다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합니다만 일생 동안 손에 하나라도 더 쥐기 위한 경쟁은 끝이 없습니다.

 문제를 하나라도 더 맞히려면 하나라도 더 기억해야 하고,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기억해야 합니다. 한 문제 차이로 당락이 좌우되고 단 1점 차이로 승패가 결정되는 이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으려면 오로지 기억력이 최고의 무기, 그래서 메모를 하고 입력을 해서라도 온전하게 기억하려고 애를 씁니다.

 학교 시험부터 여러 고시들, 입사시험과 승진 시험까지 기억력이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고 패자가 되는 순간 이 사회에서는 루저로 살아가는 게 현실이니까요.  




 기억이 우월하다고 하는데 그럼 망각은 필요 없는 걸까요? 만약에 망각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좋지 않았던 일, 살면서 끔찍한 사건을 목격한 공포감, 마음의 상처가 깊은 흉터로 남을 만큼 아팠던 사건,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들. 이 모두가 기억으로 남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지면서 잊고 살아갑니다. 만약 이런 기억이 지금도 매일 생생하게 떠오른다면 삶 자체가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 아닐까요? 하루도 온전하게 살기는 힘들 겁니다. 


 “우리는 기억을 못 해 낭패를 당하지만, 망각 때문에 평안하기도 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뇌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는 기억뿐만 아니라 적절한 망각 기능도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습니다. 망각이 있기에 심리적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보다 나은 활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건 아닙니다. 살아가는 내내 슬프고 괴롭고 힘든 고통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고통을 치유하는 기능이 망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망각은 신의 배려라고도 합니다. 


 기억이 좋아야만 인정받는 현실이지만 삶을 보다 편안하게 하는 건 망각입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 예전에 좋아했던 장소, 가슴 벅찬 감동스러운 순간들. 기억이 추억으로 떠오르는 건 망각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기억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망각이 있기에 기억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망각은 삶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어떠한 일도 빠짐없이 기억한다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이나 치욕스러운 일이 잊히지 않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망각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면 그 또한 엄청 큰일일 수 있습니다. 자칫 영원히 기억을 잃을까 봐, 그러다 나 자신도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 됩니다. 소중한 가족도 못 알아볼 테니까요. 요즘 누구나 두려워하는 알츠하이머 치매처럼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평소에 머리를 많이 쓰라고 합니다만 한평생 책만 보며 연구한 학자도 자신이 누군지 모르게 되는 걸 보면서 '인생은 알 수 없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날의 즐거움과 지금의 행복은 기억에서 나옵니다. 아울러 지난날의 후회와 지금의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잊어야 할 일은 잊어야 즐겁고, 기억해야 할 일은 기억해야 행복합니다. 망각이 신의 축복인 이유, 고통과 증오를 잊고 사랑으로 채울 수 있으니까요. 괴로움보다 지금 즐겁게 살 수 있는 이유에는 망각도 한몫합니다. 누가 미워질 때나 지금 괴롭다고 느낄 때는 망각의 도움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창문을 환기 시려고 갔던 할아버지, 냉장고 문을 열었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창문을 열고, 할머니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시원한 물병을 꺼냅니다. 두 분이 함께한 시간인데 누구는 기억하고 누구는 망각합니다.

 깜빡깜빡하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멀어지는 것 같아서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망각의 세월을 살아갑니다. 


 오늘도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고 갑니다.

 좋은 기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아픈 기억은 잊어버립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는 망각의 도움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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