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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12. 2021

낙엽 한 장에 담긴 生의 의미들

 길을 걷다가 잠깐 멈춰 서서 가방을 열고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허공에서 팔랑거리던 낙엽 하나가 가방 안으로 쏙 들어왔습니다.

 사방 천지가 낙엽인데 어떻게 이 낙엽은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으로 가방 안으로 사뿐히 들어왔을까요? 딱딱한 바닥보다는 가방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일까요? 아니면 사람 손길이 더 그리웠을까요?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방 안에다 낙엽 한 장을 담아 들고 하루 종일 같이 다녔습니다. 지난주 일요일, 입동(立冬) 때 낙엽 한 장과 보냈던 일이었습니다. 


 겨울로 들어선다는 입동, 날씨가 꽤 추울 거라고 마음 단단히 먹었는데 30년 만에 가장 따뜻한 입동이었다고 합니다. 가벼운 옷차림에도 추운 줄 몰랐던, 정말이지 단풍 구경하며 나들이하기 딱 좋았습니다. 가을의 절정을 만끽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날씨였습니다.  




 30년 만에 찾아온 가장 따뜻한 입동 날씨는 불과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급변했습니다.

 높고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짙은 그레이 한 하늘에서 가을비가 쏟아졌습니다. 더군다나 비가 그치자 날씨는 예년보다 추워졌고요. 다른 예보는 자주 틀리면서도 이런 일기예보는 기가 막히게 잘 맞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비 그친 뒤 내린 올해의 첫눈, 11월 초순인데 벌써 내린 올해 첫눈, 예년보다 한 달 앞서 내린 첫눈이었습니다. 첫눈을 기다리는 설렘을 가질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가장 따뜻하게 시작한 끝자락의 가을, 하루 만에 비 내리고 눈 오는 하늘을 보며 엄동설한을 재촉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날카롭습니다. 게다가 처량하기까지 해서 주위를 스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인지 자꾸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은 빨라집니다.

 며칠 전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단풍들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되어 비 젖은 거리에 화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여유로웠던 마음은 조급해지고요, 경외한 마음으로 질렀던 탄성은 신발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낙엽을 떼내며 짜증으로 바뀝니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사람 마음도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비가 그치고 난 오늘, 추워진 날씨 탓에 건물 안으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을 따라 들어온 낙엽들도 추운 날씨에 놀란 듯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마치 '너무 춥다, 추워. 추운데 나도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라고 하면서 말이죠.


 건물 앞 횡단보도에서는 신호가 바뀌자 낙엽들이 데구루루 굴러갑니다. 친구 따라 무리를 지어 이리 몰렸다가 저리로 갔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가를 하며 자기 갈 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돌아갈 곳을 찾는 지구 위의 마지막 여행길 같습니다.  




 낙엽 한 장에도 생(生)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수수 흩날리는 낙엽을 보면 인생무상을 떠올리는 철학자가 되어 보고, 모든 걸 비운다는 시를 읊는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갑니다. 결국엔 자기가 본래 났거나 자랐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가르쳐줍니다.

 엽락지추(葉落知秋)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걸 보며 가을을 안다는 말입니다. 낙엽이 하나 떨어지면 계절이 벌써 가을로 들어섰음을 아는 것처럼 조그마한 현상으로부터 커다란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낙엽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바람 부는 날에 낙엽이 춤추는 모습을 결코 본 적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허무해하기보다는 춤추는 낙엽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이 가을에 필요한 감성이자 삶을 넉넉하게 살아가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며칠 전 가방 속에 제 발로 들어온 낙엽 한 장을 보며 이 녀석의 생은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름 모를 나무에서 매서운 추위를 뚫고 한 장의 이파리로 태어났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하루 성심성의껏 살아왔습니다.

 노란 새싹이 돋을 때는 엄동설한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봄을 알리는 희망을 주었고요. 푸른 실록이 되어서는 매미와 함께 시원한 그늘을 선사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 빨간 물이 들어 아름다움을 선물하고는 자기 시절을 마감하며 떨어집니다. 그리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직전, 그동안 살아온 이 세상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바람을 따라 여기저기 맴돕니다.

 마른 잎을 날리면서 시간은 가고 흩날리는 낙엽 따라 우리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환절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이쁜 낙엽의 계절도 있습니다.

 거리에 나무는 물론 산 전체도 빨갛게 물들인 낙엽들이 흩날릴 때는 마치 내리는 비의 분위기를 풍깁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낙엽들 위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연인들은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낭만을 즐겼습니다. 이제는 거리마다 군데군데 쓸어 모은 낙엽 더미가 수북한 걸 보니 확실히 겨울로 들어서려는가 봅니다.

 마치 멋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운치까지, 가을은 낙엽으로 인해 끝까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어느새 11월도 중순입니다.

 바쁜 일 마무리하고 차 한 잔 들고서 창가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면 가을 끝자락의 충만함이 깃듭니다. 


 올해 가을은 듣도 보도 못한 한파에, 엄청 따뜻한 입동에, 느닷없이 내린 첫눈까지 유별난 계절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덕스러운 날씨에 놀랐지만 그래도 가을비에는 운치가, 포근한 입동엔 즐거움이, 첫눈에는 신비로움이 있었습니다.

 길바닥에 달라붙어 이별을 고하는 낙엽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낙엽 한 장에도 무수한 시간을 견딘 상처와 흠집이 있습니다. 낙엽 하나하나에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거고요, 때가 되면 모든 걸 비우고 미련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깨달음도 있습니다. 


 감성이 충만한 시간인 가을의 끝자락, 낙엽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딘 흠집과 상처를 다독이고 저마다의 사연을 끌어안아 봅니다. 이런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는 여유가 어울리는 주말권입니다.

 예년보다 한 달이나 앞서 첫눈을 선사한 가을을 아름답게 떠나보내며 나를 위한 나만을 생각하는 작은 풍요를 누리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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