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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피 Oct 25. 2021

퇴사자의 평화롭기도 의아하기도 한 나날들

퇴사자 에피소드 6가지




퇴사한 지 약 두 달가량 되어간다. 벌써? 그런데 퇴사자 신분이 되고 나니 느껴지는 감정들과 생각의 결은 재직자일 때와 분명히 다르다. 언제 또 내가 퇴사하고 이런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까 싶다가도, 나도 회사를 가긴 가야 되는데 싶다가도, 지금 편안한 이 순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퇴사자 생활이 어언 2개월이 되어간다. 그동안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 퇴사자가 같은 퇴사자를 보며 배신감을 느끼고

퇴사할 즈음 유튜브에 퇴사, 퇴사 후 일상, 퇴사 브이로그 등을 검색해보곤 했다. 약간 영화 예고편을 보는 마음으로 찾아봤달까? 다른 퇴사자들은 어떻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 퇴사를 선택했는지, 회사가 아닌 다른 결말이 진짜 있었는지, 그리고 그걸 성취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된 퇴사 영상들은 몇 개월 전에 업로드된 것들이었고, 그 사람들의 채널에 들어가서 보면 최근 영상은 취업 브이로그, 직장인 브이로그가 업로드되어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약간의 배신감이 느껴졌다. '아니, 퇴사했다며. 근데 다시 결국 회사 간 거야?'라는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그렇지. 나도 다시 회사 가겠지'였다. 아마 내 선택에 대한 배신감을 예고로 본 것 같아 어이없었나 보다.



2. 퇴사자를 퇴사자라 말하지 못하고

마치 내방 벽지처럼 나를 설명해주던 '회사&직업 타이틀'이 없어지고 나니 비로소 체감했다. 소개팅이 들어오면 주선자에게 나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바로 묻지 못하고 소개팅 상대방에게 물어보곤 했다. "저에 대해 어떤 설명이 갔던가요?", "제가 혹시 퇴사한 건 들으셨나요?"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면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겠지만 혹시나 상대가 모르고 나왔을까 하여 한 번 더 재확인했다. 잘못하거나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를 설명할 분명한 구석이 없다는 게 애석하고 찜찜했다.



3. 엄마 친구들한테 나 퇴사했다고 말했어?

직업과 연봉, 결혼 여부가 흔히 오고 가는 60대 중년 여성들의 대화에서 엄마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만일 엄마가 다른 엄마 친구들에게 내가 퇴사했다는 이유로 이유 모를 딱함이나 조언을 들으면 속상하지 않을까? 아! 그건 엄마가 선택하는 엄마의 감정이자 생각이지만, 내가 그걸 선택할 수 있다면 기필코 엄마가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길 바랬다.


친구들을 만나고 온 엄마한테 물었다. "그래서 엄마. 나 퇴사했다고 아줌마들한테 이야기했어?" "응" "엄마는 괜찮아?" "알게 뭐야. 그냥 너랑 놀러 다닐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각자의 아들, 딸을 직업으로 설명하는 당연한 상황 속에서 우리 엄마가 혹여나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하는 나의 노심초사 세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4. 이상하게 친오빠가 옷을 사준대. 갑자기 왜 그래?

별다를 것 없는 한국 남매 사이인 오빠와 나. 가끔 엄마 왔냐. 화장실 들어가 있냐. 해피(강아지) 어디 갔냐는 대화만 오고 가는데 어느 날은 웬일인지 옷을 사준다고 했다. "나 백화점에 옷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동공 지진) 어?" "같이 가면 티셔츠 하나 사줄게" "티셔츠를 사준다고? 옷 골라줄 사람 필요해?" "아니야. 이미 골랐어. 아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안.. 안 가요! 괜찮아요."


엄마한테 물어봤다. "엄마. 오빠가 이상해. 갑자기 티셔츠를 사준대" "네가 불쌍해 보이나 보지" "내가 왜 불쌍해?" "회사 안 가고 있으니까 딱해 보이나 보지" "아? 나 지금 회사 안 가서 불쌍한 거야?" 싶다가도 아. 집에 있으니까 그래 보일만 하다 싶다가도, 아닌데? 나도 열심히 사는데? 아무튼 이상해. 오빠가 옷을 사준다니. 서쪽에서 해가 뜰 일이다. 퇴사하면 가족들이 잘해주는 건가...? 의아한 일들의 연속이다.



5. 친구들이 늘 하는 말 "야~퇴사하고 너무 좋겠다. 너무 부러워!"

하루하루 고생하고 버티는 친구들한테 회사 퇴사해서 너무 좋다고 말하다가도 그들이 느끼는 일말의 씁쓸함에 대하여 모른 척하지 않고자 조금 있다 "난 돈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개미의 연대에서 발 벗고 나온 것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이랄까. "돈이야 자유야? 설마 돈을 버릴 셈이야?" 하면 친구들도 웃어넘긴다.


퇴사하는 당일까지 나에게 모진 말을 내뱉던 상사의 언어들 속에서 헤어 나오고 나니 이렇게 내 세상이 평화로웠던가 새삼 낯설다. 아 나 원래 이렇게 성격 좋았었지.라고 느끼는 요즘이다. 한 친구에게 "그렇지만 나 곧 회사를 가야 할 것만 같아"라고 이야기했더니 "불과 한두 달 전까지 너도 그 삶에서 복닥거렸다는 걸 잊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고 말해줬다. 맞아. 근데 사람은 참 적응의 동물이구나. 그렇게나 퇴사 결정하기가 힘들었는데 막상 하고 나니까 너무 평화로운 나날들의 연속이니 참 좋다.



6. 그런데 나 다시 회사에 가고 싶어 졌어...!

퇴사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회사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내가 나도 어이없었다. 난 분명 퇴사할 때 딱히 이직이나 특별한 진로 계획을 세우지 않고 나왔다. 전쟁 같은 밥벌이와 성공을 향한 열망 속에서 한 다섯 발자국 나오니 이렇게 숨 쉬기 편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나고 대단한 하루하루를 보낸 건 아니었지만 5년이란 시간 속에서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난 잘 알고 있었다. 성공하고 싶고, 돈 많이 벌고 싶고, 건물 사고 싶고 집 사고 싶고 해서 열심히 열심히 살던 지난 날들 말이다.


그런데 친구들이나 주변 지인들이 하는 회사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다시 회사에 가고 싶어 진다. 그들이 열심히 살고 있는 강강술래 현장에 나도 옳다구나 손 맞잡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자로서 난 할 말이 없다. 분명 조직에 가고 싶지 않다고 뛰쳐나왔는데 왜 다시 회사에 가고 싶은 거니?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물론 일상 속에서 주는 소소한 행복들도 있지만, 일을 했을 때 느끼는 희열과 즐거움, 몰입감은 일을 해야만 얻어지는 행복한 감정들이었다. 뭔가 살아있다고 느꼈던 순간들이었다. 시너지 내는 사람들,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데 생각이 닿는 순간, 회사에 곧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분명히 퇴사를 할 때 조직 생활 당분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랑 함께 일하고 갈등을 겪더라도 해결점을 찾아가는 그 과정이 흡족했던 걸 보면 조직 생활도 해볼 만한 것 같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려고 과거는 옅어지고 좋은 기억만 남긴다죠. 아무튼 개미들의 연대에 기꺼이 들어가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시너지를 내며 프로젝트를 하고 성과와 작은 성공들을 맛보고 싶어지는 저녁이다.


언제나 그렇듯 야금야금 조금씩 노력을 할 것이다. 능력이라는 게 한 번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겹겹이 쌓여 나를 알아봐 주는 회사와 사람들이 생기고, 그 속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맛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낼 미래를 그리며 기다릴 것이다. 개미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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