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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밤 과자점 May 23. 2021

It must be my lucky day 1

운수 좋은 날 - 런던에서 맹장염이라니요.

그저 배가 더부룩했을 뿐이었다. 

저녁으로 샐러리, 고구마, 인절미 2개를 먹고 났는데 뭔가 뱃속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 날도 있지 싶었고, 구내염도 잘 안 낫고 하여 잠을 자면 좀 괜찮겠지 싶어 일찍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질 않고 배는 불편한 상태로 누운 지 3시간 정도 지나 밤 11시쯤이 되었나 울렁거리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에 화장실로 갔다. 결국 구토 후에 약간 탈진한 느낌으로 침대에 누웠는데 1시간쯤 잠을 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배가 아픈 건지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어 눈을 떴는데 오른쪽 아랫배를 꾹꾹 누르니 왼쪽 배와는 다른 통증이 느껴졌다. 이 느낌은 평소 급체했을 때나, 장염 증상과는 조금 달랐다. 살려고 그랬을까? 급하게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맹장염 증세, 맹장염 초기 증상. 몇 개의 글을 읽었는데 기분이 싸-했다.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이 느낌은 충수돌기염 증상이 맞는 것 같다. 저녁 먹은 후부터로 치면 증상이 시작된 지 이제 4~5시간 정도 된 거니까 48시간 골든타임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새벽부터 응급실을 가기도 싫고, 곤히 자고 있는 혜림이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버텨 볼 요량으로 눈을 감으며 스스로에게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걸어본 것도 얼마 안 갔다. 


 새벽 2시. 

 다시 한번 울렁증과 식은땀이 찾아왔다. 이제는 가야겠다. 맹장이 터지면 더 골치 아프니 깔끔할게 처리할 수 있을 때 가자 싶었다. "혜림아, 나 응급실 가야 할 거 같아. 배 아파."라고 했던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고 있는 혜림이를 불러 깨웠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신분증 정도만 챙겨서 나왔다. 불현듯 이 집을 얻을 때가 기억났다.

"여기 바로 근처에 응급실 있는 종합병원 있어서 밤에 앰뷸런스 다니면 시끄럽지는 않을까?"

라고 말했던 기억. 

그리고 나는 그 응급실 있는 종합병원 'Royal Free Hospital' 응급실로 걸어서 갔다. 도보 5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는 집을 얻은 보람을 절실하게 느끼며 걸었던 길 중 가장 짧고도 긴 길을 걸었다. 


Royal Free Hospital (이미지 출처: Independent 신문기사에서 가져옴)


응급실 입구에 들어서니 직원이 체온을 측정해보고 'Green' 딱지를 줬다. 그리고는 옆에 어디 다른 곳으로 가라고 뭐라 하는데 아프니까 영어는 더 들어오지도 않았고 혜림이가 가는 데로 쫓아갔다. 그렇게 바로 옆 또 다른 응급실 입구에 들어섰는데 코로나 때문에 환자만 출입 가능하고 보호자는 동반이 안 된단다. 에잇 빌어먹을 코로나! 아픈 나는 그냥 혼자 들어갔다. 발길을 돌려 혜림이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엉겁결에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예고도 없이, 예측도 하지 못한 채로, 황망하게 헤어졌다. 새벽 2시 48분. 철저하게 혼자가 된 시간.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제 나 혼자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살아서 나간다.'

그렇게 접수대 앞에 섰다. 


새벽 3시쯤이었으니 그도 적잖이 피곤하고 귀찮았겠지. 만사 귀찮다는 듯한 표정의 직원이 생년월일과 이름, 휴대전화 번호를 확인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여 맞은편 장소로 갔다. 의자밖에 없는 그 대기실에 나 말고도 한 6-7명이 앉아 있었다. 다들 아프다고 구르지도 않았을뿐더러 숨 죽이며 앉아 있는 것처럼 적막만 흘렀다. 나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누군가 나를 불러 주기까지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뒤엉켰다.   


'왜. 지금. 이 시점에. 40년 동안 멀쩡하던 맹장이 폭발한 것인가!' 

'영국 오기 전에, 설마 맹장염 걸리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내 잘못이야'

'아냐 아직 맹장인지 아닌지 모르잖아. 그냥 장염일 수도 있어, 급체일지도 모르지'

'맹장인 줄 알았는데 맹장 말고 더 안 좋은 병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래 탓하면 무엇하리오 남의 몸도 아니고 내 몸인데.' 

'심지어 아픈데 아무도 옆에 있을 수 없는 코로나, 너 정말 뭐냐!' 

'영국에서 수술받아도 괜찮겠지? 마취에서 못 깨어나는 건 아니겠지?'

'한국에 갈 수는 없으니까, 맹장수술 정도는 괜찮겠지. 작은 병원도 아니고 큰 병원인데.'

'엄마 아빠한테는 언제 말하지? 걱정하실 텐데'

'눈 뜨면 한국이면 좋겠다, 서울이면 좋겠어'

'아픈데 언제 검사하고 언제 수술하는 거야, 왜 안 불러주는 거냐고!'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 터지고, 두렵고 걱정되고, 그런데 기력이 없어서 화도 못 내고, 걱정해도 달라지지 않을 상황 속에 던져졌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소설이 떠올랐다. 어쨌건 인생 최초의 해외 살이, 석사 과정도 논문만 쓰면 마무리될 시점에, 이곳저곳 걸어서 하루 2만보를 채우며 체력을 한껏 올려놓고, 이제 코로나 백신 맞고 영국을 좀 즐겨보자 하던 그 시점에. 5월 12일. 나의 운수 좋은 날이 시작되었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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