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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제 명절 대감놀이는 그만 하시지요

님이 대감이면, 난 애기씨야.

by 멘탈튼튼 김프리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저희 남편은 명절 때만 되면 평소보다 더 몇 배는 조선시대 대감 행세를 합니다. 참고로 이 기간이 지나면 굉장히 자상하고 따뜻한 워너비 남편, 믿음직한 남편으로 되돌아옵니다.


조선시대 대감놀이 1.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성묘를 갈 때엔 10살 아들을 꼭 데리고 가겠다며 고집을 부립니다. 장남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데리고 가면 좋지요. 조상님께 인사도 드리고 여행가는 기분도 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멀미가 심한 아들인지라 조금 더 자란 후에도 장남의 도리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장남 아닌 아들 있나요? 많이 나아봐야 아이를 1명 혹은 2명 정도인데 장남이라는 의미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잖아요. 시대가 변했는데 여전히 장남타령입니다.


결국 아들은 성묘에 가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대감놀이. 2


명절엔 유난히 더 제가 부엌에 있길 원합니다. 코로나19로 간소하게 차리는 명절음식, 2일 정도 머무르는 시댁에서 제가 해야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삼시새끼를 차리거나 치우는 일,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집 치우기, 주방장이신 시어머니를 돕는 정도입니다. 심지어 어머니께서는 할 것도 별로 없다고, 너 있으면 더 불편하다고 얼른 주방에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당신 살림, 당신께서 후다닥 헤치우시는 게 편하다고요.


그래서 방에서 쉬고 있으면 "가서 엄마 좀 도와"라며 남편이 싫은 티를 냅니다. 싸우기 싫어 또 주방에 가서 뭘 할라치면 어머니께서 할 일 없다고 가라고 하십니다. 물론 일이 많으면 눈치있게 곧잘 돕습니다. 제가 손이 빠르거든요.


정작 본인은 하루 종일 자고, 먹고, 놀면서 제가 좀 쉬는 모습을 보는 게 불편한가봅니다. 명절에는 며느리가 일을 많이 해야한다고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시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이기도 하시니까요.


이해는 합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제가 도와드리길 바라는 마음은요. 시댁에서 차례를 지낼 때는 명절 전날부터 하루종일 일합니다. 그런데도 유난히 명절만 되면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제가 눈치없이 탱자탱자 노는 스타일도 아닌데요.


조선시대 대감놀이. 3


추석당일, 성묘를 갔습니다. 시아버님 형제들이 많이 모였고 비가 많이 내려 날이 좀 사나웠지만 벌초도 했고 준비해 간 음식으로 차례상도 차려 절도 했지요.


모든 일이 끝나고 근처 정자에서 점심상을 차렸습니다. 문을 연 식당을 찾아도 집합금지명령 때문에 단체식사가 불가능하니 준비한 음식을 야외에서 후다닥 헤치우는 게 낫겠다 싶었지요.


자연스럽게 사는 이야기가 오고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명절 때만 되면 남편은 시어른들 앞에서 저를 깍아내리는 소리를 합니다.


"엄마, 우리는 밥통에 밥이 2~3일 되도 그냥 먹어"

"삼촌, 저희 집엔 짐정리 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거 다 못하는데 얘가 정리 하나는 잘해요"


이런 말들은 굳이 안해도 됩니다. 몇 일 지난 밥을 먹는 것보다 갓 지은 밥을 먹는 날이 더 많고 저는 정리만 잘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도 잘 키우고, 제 일도 척척 잘 해내며 요리도 곧 잘 합니다. 평소에는 이런 말들을 남들 앞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칭찬하는 말이 어색한 사람이라 칭찬도 안하고 흉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유난히 명절 때만 되면 시어른들 앞에서 제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길고 긴 명절 당일 성묘길이 끝나고 밤 9시가 되어 시댁에 도착하니 하루종일 4명의 아이들과 시할머니 수발을 드느라 고생한 여동생에게 또 한마디 합니다.


조선시대 대감놀이. 번외편


"XX아. 아버지 밥 차려라 "


물론 아가씨는 이미 익숙한 듯 한 귀로 흘려 듣습니다. 이미 시아버님 저녁 식사는 발 빠르신 어머니가 준비중이신데 이런 말을 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웃자고 한 말인까요? 아님 먼 길, 성묘 다녀왔다고 생색 내고 싶은 걸까요?


이런 말을 듣고 그냥 웃으며 지나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결혼 9년 내내 명절 때 이유없는 1패를 당하다보니 이제 저도 가만 있지는 못하겠더라구요. 기회를 노려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경고도 했죠.


"자기는 명절 때만 되면 왜 대감님 행세를 해? 꼰대같이? 속도 없이 안해도 될 말을 하고?이번엔 내가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부터는 말 조심해. 공개적으로 날 망신 주는 게 재미있나봐?"


남편이 가부장적인 면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시댁 문화 자체가 굉장히 보수적인 것도 받아들이고 적당히 융통성있게 처신하려고 노력합니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명절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따져봐야 의미없기에 그냥 저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특별히 제가 잘못한 상황도 아니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흉도 칭찬도 아닌 애매한 웃자고 말들을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칭찬은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저를 깎아내리는 말들은 안해야 맞다고 봅니다. 제 남편도 흉볼 게 없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친정 식구들 앞에서 남편을 허물을 재미삼아 들춰내지는 않습니다.





남편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였는데 미안하다며 진심을 담아 사과했고 이번 명절은 무탈하게 지나갔습니다. 저희 부부도 명절만 되면 다투는 대한민국의 흔한 부부였지만 이번 명절은 서로가 실수한 부분을 인정하고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대화로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대게 명절은 며느리들에게 힘든 시간입니다. 몸도 힘들지만 시어른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심적으로 큰 부담이니까요. 몸으로 하는 일이야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남편이 아내 마음은 좀 편하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요?물론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말과 에너지가 오가는 그런 명절이 계속되길 소망해봅니다.


* 이 글은 다 모이면 42명인 대가족 시댁에서 장남 며느리로 살고 있는 김프리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배우자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점 참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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