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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아피디 Jan 16. 2021

서핑의 추억[3]

발리에서 생긴 일

그놈의 두 눈깔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멎을뻔했다. "엄마야." 하고 외마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치 연쇄살인범을 목격한 것처럼 뒷머리카락이 쭈삣 서고 소름이 돋았다. 직원이 범인을 찾았다며 내게 CCTV 영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놈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척하면서 한 손으로는 라커들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안 열리는 라커를 지나 쉽게 열리는 내 락커를 몸으로 느끼더니  돌아서서 지갑에서 돈을 한 움큼 꺼내고 다시 지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CCTV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그놈의 눈깔과 내 눈이 마주친 것이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고도 또 다른 락커에서 크림을 꺼내서 자기 몸에 잔뜩 처바르더니 다시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때도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 카메라는 누가 봐도 작동 안 할 것처럼 생겨먹었다. 그래서 그놈도 당연히 작동이 안 되는 줄 알았나 보다. 그러면서 사람 간 떨어지게 자꾸 왜 쳐다보기는 하는지 미친놈이...  


11명의 동기들이 달려왔다. 여자들도 돌려보다가 같이 소리를 질렀고 남자애들은 자기네 호텔에 묵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놈을 불러다 놓고 12명이 둘러쌌다. 만난 지 5 시간 된 동기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역시 나이 든 사람은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후배들한테 인기 있다더니 이 경우도 그렇게 적용되었다. 내가 헤벌레 하고 병신같이 지갑을 여는 바람에 나와 어린 동기들은 왜군을 처단하는 이순신의 졸개들처럼 학익진을 이루어 합체한 것이다.


 그놈의 변명은 가관이었다. 자신이 대단한 외국인 회사를 다니는 그럴 듯 한 사람이라고 본인 소개를 했다. 보기에도 멀쩡해 보였다. 심지어 지적으로 생겼다. 자기가 평생 그런 적이 없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놈의 손은 눈보다 빨랐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 몸놀림과  눈까리 굴리는 걸 본 자라면 그가 타짜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동기들보다 며칠 일찍 온 그놈은 여기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고 극단적인 도둑질은 교묘히 피해 가며 잡상인처럼 이것저것을 훔쳐댔다. 나 말고도 피해본 사람들도 속속 나왔다.

10만 원 정도 없어졌는데 그놈은 20만 원을 줬다. 저도 얼마를 훔쳤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훔치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이로서 나는 지름신이 보우하사 10만 원의 꽁돈을 또 획득했다.


 모래바닥에서 가여운 늙은 거북이처럼 파닥거린 수고는 현금으로 보상되어 돌아왔다. 나는 11명의 동기들에게 외쳤다. "다들 어디서 오신 어느 댁 규슈들이고 도령들인지 모르겠사오나 오늘 점심은 제가 쏘겠습니다. 그대들이 있어 든든하고 안전하게 도둑고양이를 잡았습니다. 자 저를 따르시지요." 하고 우리는 근처 식당에 갔다.


 점심을 먹으면서 통성명이 이루어졌고 마치 십 년 동안 못 보고 헤어졌던 형제자매들이 상봉한 것처럼 급속으로 친해졌다. 언제 봤다고 언니 누나 동생 난리가 났다. 역시 한국인들은 위기에 강하고 난리통에 결속력이 강해진다. 락커에 문도 안 잠그고 현금을 버젓이 넣고 다니는 단 한 번의 병신 짓으로 나는 동기들의 우두머리이자 영웅으로 등극했다. 그 후 우리는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밥을 같이 먹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리 12명의 전사들은  드디어 바다로 출격했다...


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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