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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아피디 Jan 20. 2021

수박 겉핥기 인생

 방송가에서(내가 유명하다는 거 절대 아니고 내 주변 방송인들 사이에서만) 한 때 내 별명은 론칭의 여왕이었다. 기획을 해서 방송을 올리는 것을 참 많이 했다. 하지만 방송의 특성상 하나 기획해서 방송에 띄우는 것은 짧게는 서너 달 길게는 1년 정도 걸린다. 요즘 예능은 준비기간이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론칭을 잘한다는 것은 좋은 장점이긴 하나 그 과정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고 험난하다. 론칭이 끝나면 기획자의 본분을 다한 나는 방전이 돼서 후배들한테 넘기고 나가떨어진다. 그래서 한두개 장수 프로그램만 딱 맡아서 관리하는 다른 CP급 피디들을 부러워했다. 참 안정적이다. 어쩜 저렇게 진득한 삶을 누릴 수가 있을까?


 하지만 천성 자체가 새로운 것은 좋아하고 인성은 진득하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다. 이는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운동 취미나 어학공부 등에서는 안 건드려 본 분야가 없다. 서핑, 스쿠버다이빙, 복싱, 영어, 일어, 펜 드로잉, 줌바, 에어로빅, 캘리그래픽, 살사, 요가, 필라테스, 스페인어, 베이스 기타 등등 내가 대한민국에 뿌린 사교육비가 얼마인지 가늠도 안된다. 하지만 맥시멈 3개월에서 6개월이다. 조금만 힘들거나 지겨워도 냅다 도망친다. 집안 곳곳에 취미 시작에 동원된 물건들의 잔해가 공동묘지를 이루고 있다. 발에 걷어 차인다.


그러기를 근 20년이다. 그러면 제발 좀 그만 좀 등록하면 얼마나 좋은가? 난 아직도 작년 중반부터 시작한 우쿨렐레 중국어 골프 수업 등록상태다. 코로나로 두어 달 쉬었는데 이제 다시 수업 시작해야 한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내 구독자 분 중에 [이작가야]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영어 대학강사를 하시면서 각종 운동 자격증이란 자격증은 다 따시고 한번 시작하면 그 분야에 전문 자격을 무조건 획득하시는 분이다. 눈물 나게 부러웠다. 심지어 요리도 잘하시고 <라면 영어>라는 영어 책도 내셨다. 두렵지만 얼굴도 이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러던 중 구독자님 중에 [앤디]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글 중에 <시즌제 인간>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 그분도 나와 같은 종류의 인생을 살고 계셨다. 같은 자책성 고민을 하다가 자신을 시즌제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규정하기로 했다고 하셔서 무릎을 쳤다! 나도 시즌제 인생을 살아왔구나. 뭔가 어딘가 분류되는 인간형이라 새로운 그룹에 소속된 것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3년 전 어느 여름 후배한테 신세한탄을 한 적 있다. "난 왜 이렇게 끈기가 없는 거지? 왜 시작을 멈추지 못하는 거지?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후배는 끈기의 여왕이었다. 영어랑 살사를 혼자 끈기 있게 마스터 한 그녀는 늘 나보고 그만 좀 등록하라고 핀잔주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 날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은 그래도 한 가지 일을 20년 넘게 하셨잖아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저 보세요. 30대에 직업을 벌써 세 번이나 바꿨잖아요. 그리고 다른 건 뭐 양자리니까 어쩔 수 없어요. 원래 양자리 사람들이 도전정신은 강하지만 뒤가 없거든요. 이제부터 선배님을  [프로 시작러]라 부를게요. 죽을 때까지 하다 보면 뭐 하나는 걸리겠죠 설마...  " 나는 별자리 공부를 막 시작한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콤플렉스를 면죄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죽기 전에 뭐 하나는 걸리겠죠!


그렇다. 평생 수박 겉핥기만 해온 인생이라 수박 속의 단맛을 한 번도 느껴보진 못했지만 죽기 전에 뭐 하나는 걸리겠지. 그것이 글쓰기였으면 좋겠다. 글쓰기는 누구도 필요 없이 돈도 필요 없이 혼자 작업 가능하다. 그동안 쌓아온 온갖 잡 교육에 들은 풍월은 많다. 깊게는 몰라도 얇게는 안다. 얕지만 넓은 글쓰기로 그리고 점점 더 깊어지는 글쓰기로 나아가면 된다. 여기저기 다른 글들로 널 뛰기를 하면 된다. 그리고도 하나하나가 완성되기 때문에 나한테는 최적의 장르다. 죽기 전에 걸리는 하나가 글쓰기였으면 좋겠다. 요즘은 일은 하기 싫고 글 생각만 난다. 제발 이것이 그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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