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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아피디 Jan 22. 2021

서핑의 추억[4]

발리에서 생긴 일

 드디어 바다로 출격! 모래바닥에서 파닥거리던 연습은 무용지물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에 보드는 뒤집어지고 나는 통돌이 세탁기에 돌림질 당하는 빨랫감처럼 바닷속에서 소용돌이질을  당하기만 했다. 잡아 탈 파도가 있는 고지를 향해 가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파도 지점에 도착해서 야무진 파도 하나를 잡아  원주민 강사가 [업]하고 구령하고 뒤에서 밀어주면 보드 위에 일어나야 한다. 물론 중심을 못 잡고 쓰러졌다. 바닷물을 코로 먹는다. 바닷물인지 내 눈물인지 분간 안 가는 소금물이 눈에서 철철 흘렀다. 또 패들링 한다. 또 파도가 온다. 뒤에서 또 내 보드를 밀어준다. 또 지긋지긋하게 업을 외쳐댄다. 오후 내내 이 짓만 반복했다. 패들링 업 미끄덩 사람 살려!!!


 나중에는 한 스무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원주민 강사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야 인마! 내가 업이란 게 뭔지 안다고! 뜻을 모르는 게 아니라고. 내가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어도 너 같은 자식이 있어. 쨔샤! 어따대고 자꾸 소리 지르고 명령질이야. 나도 업이 뭔 줄 안다고!!! 엉엉엉" 그 날은 한 번도 보드에 제대로 올라타지 못하고 오후 강습을 마쳤다. 원주민 청년이 나만 보면 길거리에서도 내 얼굴에 대고 "업!!!" 이러고 웃으며 지나간다. 정말 약 올랐다.


 그러기를 무려 삼일 아침 오후를 반복했다. 새벽에 서핑 아니 흉내. 오후에 서핑 흉내. 다른 동기들은 이미 벌써 진정한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몇몇은 그동안 여러 차례 해외에서 서핑을 즐기며 다닌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발리 여행에 쓴  돈의 가치를 충분히 누리고 있었다. 내가 블로그 사진 속에서 본 청춘남녀들처럼 천국을 누비며 파도를 즐겼다.


 나는 밥만 축내고 있었다. 불구가 되다시피 한 몸을 회복시키려 어린 동기 친구들과  마사지를 받으면서 생각했다. 이들은 마사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뭘 했다고 마사지를 받는가? 물론 돈이 싸기도 했고 발리에선 딱히 저녁에 할 일도 없다. 마사지를 받으면서 서러운 기분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3일 동안 바닷물과 그냥 물을 하도 먹어서 화장실을 자주 가야 했다. 그것도 마치 빈뇨 증세를 맞이한 늙은이처럼 서러웠다.


 4일째 되던 날 그것도 훈련이랍시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통에 허벅지에 힘이 생겼는지 나는 드디어 첫 파도를 탔다. [업]하는 순간 젖 먹던 힘을 다해 올라서서 보드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오 하나님 동기들이 말하던 [물뽕] 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군요!!! 말 그대로 뿅 가는 기분이었다.  파도 위를 미끄러지는 그 기분은 정말 문자 그대로 [째진다]였다!  파도를 째면서 얼굴에 바람을 맞이하는 그 기분이야말로 천국이요 나는 바다 위를 가르는 천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드디어 서퍼가 된 것이다. 음하하하하하. 지름신이 나를 가엽게 여기사 내 모가지를 끌어다 보드 위에 얹어주신 것 같았다.


 이 후로 나는 아침 오후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서너 번씩은 파도에 올라탔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죽하면 파도를 헤쳐나간다는 표현이 있을까?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무엇보다 그 어린 강사와 동기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줬다. 이미 내 나이가 털려 나는 힘없는 위로만 받던 중이었다. "언니 나이에 여기 오는 게 어디예요? 나는 그 나이에 혼자 이런데 절대 못 와요. 대단하신 거예요" 그런 위로만 해야 하는 동기들은  죽을 맛이었을 텐데 자신들이 더 기쁜 건 당연한 이치다. 나는 파도를 즐기는 자가 되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캠프 사무실에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두 시간 정도 여유가 생겨 벽마다 둘러싸인 책장을 둘러보았다. 좋아하는 김연수 소설가의 <세상의 끝 여자 친구>라는 책이 눈에 띄어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다. 책을 훑어보는데 어랏! 돈이 껴 있었다. 메모지와 함께... 읽어보니 여기 서핑 캠프 풍습인데 뒤에 오는 서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남은 현금을 책 안에 숨겨 놓고 발견한 사람이 쓰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 돈을 발견하신 분 앞으로도 행운이 계속되시길 바란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동기들과 직원에게 보여줬다. 그 많은 책 중에서 어찌 발견했냐며 다른 돈들보다 훨씬 큰돈이라며 축하해주었다. 약 4만 원이었다. 지름신의 보우하심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 돈으로 공항에서 동기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한국으로 귀국한 뒤 새 직장을 다니게 되었고 동기들과는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그중 세명과는 각별히 친해져서 제주도 여행도 가고 잘 지낸다. 그들의 소개팅도 주선해 줬다. 뭐든지 안 해보는 것보다는 저지르고 보는 게 낫다는 경험치를 또 쌓았다. 나의 호기심 천국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 같다.  ㅡ끝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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