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5 발송 레터
올해 3월에 가장 설렜던 날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3월 12일 ‘전날’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3월 12일이 어떤 날이냐면 '라이온 킹' 뮤지컬을 예매해 둔 날짜였다.
나는 뮤지컬 덕후다. <지킬 앤 하이드> <프랑켄슈타인> <아이다> <빨래> 등 꽤 유명한 뮤지컬을 꾸준히 봐왔는데, 그래도 내가 아직까지 못 본 유명한 뮤지컬이 있었다. 바로 '라이온 킹'이었다.
라이온 킹 뮤지컬은 특히 나의 ‘죽기 전에 봐야하는 뮤지컬’의 위시 리스트에 포함된 뮤지컬이었다. 넘버들이 아름다운 건 물론이고, 라이온킹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가면탈들과 동물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 배우들의 움직임을 보고 싶었다.
2018년 라이온킹 인터내셔널 투어가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고가의 좌석을 결제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2년 라이온킹 인터내셔널 팀이 돌아온 것이다! 이제 돈을 버는 어른이 된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결제를 할 때 어디에 앉을지 꽤 고민을 했다.
대학생 시절엔 나는 많은 뮤지컬들을 보면서도, 1층 좌석으로 내려가본 적이 없었다. 학생 할인은 2층 좌석부터만 적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극장의 2층에서 내 검지만한 배우님들을 실눈을 뜨며 봐왔다.
이제 어차피 학생 할인도 받을 수 없겠다, 이제 돈도 버니까 1층을 결제했다. 꽤 고가의 가격에 손이 안 떨렸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결제한 직후 흥분 상태에 휩싸였다. ‘처음으로 1층 좌석에서 뮤지컬을 보게 되었어!’ ‘그것도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라이온 킹을!’
그 뒤로 일하느라 힘들어도, 뮤지컬이 예약되어 있는 3월 12일을 생각하며 버텼다. 그리고 그렇게 버텨 대망의 3월 12일이 왔다. 나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바로 1층에 입장을 하면서 감개무량했다.
그렇게 꿈꿔 온 1층 좌석에 처음 앉았을 때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2층과 달리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지 않고도 무대의 시야가 한눈에 들어와 ‘자리도 잘 잡았다!’하며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키가 크신 분이 바로 내 앞에 앉기 전까지 말이다... 키가 크신 분께서 내 앞에 앉자, 키가 작은 내 시야의 1/2이 사라졌다. 주인공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앙상블이 보이지 않고, 앙상블을 보려 하면 주연들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2층에 앉았을 땐 그래도 단차가 높기 때문에 앞의 사람 때문에 시야가 방해가 된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차가 낮은 1층에 앉자, 키가 크신 분이 내 앞에 앉아버리는 순간 시야의 1/2이 눈앞에서 가려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뮤지컬 내내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무대를 보려고 애썼다. 어떻게 해도 앙상블과 주인공이 한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서, 어떤 장면에 누구를 볼 건지 전략적으로 선택을 해야 했다.
3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그렇게 목을 돌리자 뒷목이 뻐끈해지며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라이온킹은 주연배우와 앙상블 배우의 조화로운 합이 아름다운 뮤지컬인데, 절반만 감상하게 된 게 너무 속이 상했다. 심지어 커튼콜 때마저도 앞자리 분께서 기립박수를 하기 위해 완전히 일어나셨다. 그러자 나는 그 분의 어깨 위라도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공허감과 속상함에 지하철 안에서 내내 멍을 때렸다. 뮤지컬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한 번도 1층에 가지 못해 1층을 선망해 왔던 나였다. 1층으로 내려가면 무조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1n만원라는 고가를 결제하고서도, 2층에 앉았을 때보다 시야가 더 안 보였던 뮤지컬을 보게 되자 속상함이 배로 커졌다. 나에겐 꽤 높았던 금액인 뮤지컬 티켓값이 눈앞에 자꾸 어른거렸다. 그걸 지출하기 위해 구매하기를 다음에 미뤘던 물건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렇게 실망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이었다. 환승역에서 작은 꽃집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판넬에 대문짝하게 써있는 글씨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프리지아 1묶음에 3000원’
프리지아가 한 묶음에 삼천원 밖에 안 한다고? 이 행운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꽃집 앞으로 다가가 프리지아 한 묶음을 샀다. 싱싱한 프리지아를 받아드는 순간, 나는 우울했던 기분이 확 노란빛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받았다. 프리지아 한 단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그 후로 집에 가는 내내 귀엽고도 고운 아이 같은 프리지아를 바라보느라 우울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 나 삼천 원에 행복해질 수 있네? 방금은 1n만원을 쓰고도 우울했는데...
이 글을 쓴 이유는 ‘그래서 높은 가격의 소비를 줄이고 소확행을 누리자’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뮤지컬을 계속 볼 것이다. 뮤지컬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2층에서 뮤지컬을 봐도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인 걸 알았기에, 무리하게 지출을 해서 1층에 앉지는 않을 거다.
다음에 길을 걷다 또 우연히 꽃집을 발견하면 기꺼이 들어갈 거다. 그때는 삼천원이 아니라 만원 이상의 꽃다발을 살 수도 있을 거다. 왜냐하면 내 방안을 영롱하게 밝혀주는 꽃의 존재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애정하는 아는 동생이 언제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최근에 글쓰기가 좋아졌다고. 그런데 자신이 글 쓰는 재주가 부족한 것 같아서 고민이라고. 언니는 그럴 때 어떻게 하냐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글은 잘 쓰려고 쓰는 게 아니라. 네가 행복해지려고 쓰는 거야.’
지하철 환승역 안에 있는 작은 꽃집을 지나친 사람들은 많았다. 그 지나쳐 간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프리지아’에 발걸음이 묶이는 사람인 거다. 그런 식으로 걸어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 다양한 게 있을 거다. 누군가에겐 꽃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베이킹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운동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나의 경우는 ‘글쓰기’다. 나는 글을 내가 행복해지려고 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앞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더 정확하게 알아가려고 한다. 누군가는 돈이 아깝다고 여길 수 있는 꽃을 나는 받으면 행복해지는 사람이다. 나는 노트북 하나를 덜렁 들고, 집에서 가까운 이디야 카페를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기서 글을 쓰다, 글이 안 풀리면 그 앞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한다. 다정한 사람을 만나서 서로 잔뜩 축복해주는 말을 나눈 뒤에, 충만한 마음으로 집 가는 밤길을 좋아한다.
최근에 새롭게 알게 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 일터에 가까운 빵집에서 파는 ‘바질 아보카도 샌드위치’다. 그걸 처음 먹었던 밤에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수 있구나!’할 정도로 너무 행복해졌다. 그 행복감을 잊지 못해 금요일 밤에 퇴근할 때마다 사가곤 한다. 그게 요즘 내 일주일을 살아가게 하는 낙이다. 그런 날이 있기에 나는 씩씩하게 주 5일을 출근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이 레터를 통해 후원금을 받게 되면, 바질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사 먹을 거다.
‘해윤의 해피레터’는 나의 프리지아 한 묶음과 같은 편지다. 글을 쓰는 나도 행복한데,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행복해지면 좋겠다. 꽃 한 단에 포장지를 곱게 싸 꽃다발로 만들어 건네는 꽃집 주인처럼, 나 또한 애정으로 돌돌 말아 첫 편지를 부친다.
Q.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해윤의 해피레터 비하인드 01
부제 : 해윤의 우당탕레터
첫 번째 레터를 발송하고 나서야 깨달은 게 있었다. 나는 역시나 허당쟁이라는 것...ㅋㅋㅋ 레터 마지막엔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진 란이 있었는데.
나는 이게 내가 이용하는 플랫폼이 내 피드백을 알아서 모아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피드백 페이지는 내가 스스로 만든 뒤 링크를 첨부해야 하는 형식이었다.
첫 번째 이메일을 발송하고 나서야 실수를 알아챈 나. 하지만 사실 실수를 알고 나서 내 개인적인 일기장에는 이렇게 썼다.
이 일기를 보고 나를 오래 봐주신 이웃님께서 날 행복하게 만드는 피드백을 남겨주셨다.
내 실수조차도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니! :D 완전 '해피레터' 성공이잖아~! 게다가 어릴 때 일요일 밤마다 개그콘서트를 기다리던 그 설렘을 기억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최고의 칭찬도 함께 받았다. 앞으로 내가 어떤 우당탕탕 실수를 할지 기대된다. 그 실수들로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제 피드백 페이지 설정하는 법을 알았으니, 두 번째 레터는 비하인드로 내가 받은 피드백을 함께 올릴 것이다! 그건 그거대로 너무나 기대되고, 날 행복하게 만든다.
매주 일요일 밤 9시 <해윤의 해피레터>가 발송됩니다. 구독 신청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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