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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의 해피레터 Sep 04. 2022

열두 번째 레터 : 오후 3시 30분 반 아이들

2022-08-22 발송 레터 


아무리 1대 1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들은 같은 시간에 오고, 같이 반을 쓰는 친구들을 서로 다 기억한다. 아이들은 같은 시간에 한 공간에 모인다는 이유만으로 금세 친해진다. 5분만 일찍 보내달라고 졸라서 일찍 가게 되었으면서도, 늦게 끝나는 아이를 일부러 기다려 같이 하원하기도 한다. 그렇게 친해지면 수업이 시작하는 시간마다 어떤 조합이 생긴다. 그 조합은 모이는 아이들에 따라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1시 반 수업의 아이들은 굉장히 조용하기도 하고, 5시 수업의 아이들은 굉장히 시끌벅적하기도 하다. 


1시 반 조합, 3시 반 조합, 5시 반 조합... 다양한 조합들을 가르쳐 왔지만, 내 머릿속에 유난히 뚜렷하게 떠오르는 조합이 있다. 바로 3시 30분 수업 조합이다. 그동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모두 햇살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오늘 글은 각각의 햇살이를 기억하는 게 중요해서 한 명씩 어떤 햇살이들인지 소개 먼저 하려고 한다. 


<오후 3시 30분 수업의 햇살이들>


1. 우렁찬 햇살이 : 목소리가 크다는 게 특징. 수업 때 선생님의 말에 딴지를 걸거나, 다른 아이들의 행동에 참견을 하는 편이다. 오늘 글의 주인공(?)


2. 홈런볼 햇살이 : 얼굴이 동글동글하다. 그래서 집에서 아빠가 자신을 부르는 별명이 홈런볼이라고.


3. 올라프 햇살이 : 따뜻한 허그를 좋아하는 햇살이. 오며 가며 선생님을 한 번씩 꼭 안아준다.


4. 똘똘이 햇살이 : 똘똘이 스머프를 닮은 햇살이


5. 시사박사 햇살이 : 어려운 뉴스 기사를 읽는 걸 좋아하는 햇살이 


오늘은 이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글로 써보려고 한다. 


그 당시 초보 선생님이었던 나는 우렁찬 햇살이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우렁찬 햇살이는 일단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컸다. 흥분하면 안 그래도 큰 목소리가 옆 반까지 넘어가도록 목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했다. 목소리가 큰 건 그렇다 치는데, 우렁찬 햇살이는 독서 감상문을 써야 할 때 쓰기 싫어서 선생님에게 괜히 딴지를 걸어 시간을 끌었다. 이것까지도 그렇다 쳐도 가장 큰 문제는 우렁찬 햇살이는 다른 친구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관심이 너무 많았다. 다른 햇살이가 어려운 게 있어서 나를 부르면 “그게 뭐가 어려워? 하나도 안 어려운데”라고 말해서 다른 친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이날 우렁찬 햇살이의 독서 감상문을 쓰게 하려고 했을 때였다. 책의 교훈을 이야기해주며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겨야겠죠?”라고 내가 말했을 때 우렁찬 햇살이가 “아니요~” “개미가 뭐가 소중해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우렁찬 햇살이, 생각해보세요. 만약 엄청 큰 거인이 나타나서 우렁찬 햇살이를 막 밟으려고 해요. 그럼 우렁찬 햇살이는 무섭고 아프겠죠?”라고 예시를 들었다. 우렁찬 햇살이가 말했다. 


“그런 거인은 이 세상에 없잖아요.”

“아니 아니, 만약에 있다고 상상을 해보자는 거예요.”

“에이 말도 안 돼. 없다니까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함) 만약 있다고 하면요.”

“그래도 문제없어요. 나는 완전 빠르게 거인 발을 피할 수 있어요.” 


햇살이가 계속 이런 식으로 딴지를 걸어 5분간 대화를 했는데도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문제는 이곳은 일대일 수업 방식이면서 내가 거의 다섯 명의 아이들을 케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 아이에게 너무 오래 있게 되면, 도움이 필요한 다른 아이가 방치되게 되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주의를 줬는데도 햇살이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의자를 자꾸 뒤로 젖혔다. 그래서 뒤에 앉아있는 햇살이의 가림막을 자꾸 치게 되었다. 


내가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원장실로 갈 거라고 주의를 줄 때는 “알았어요. 글 쓸게요.”라고 말하지만 그때뿐. 계속해서 장난스럽게 말대꾸를 하면서 글을 쓰지 않았다. 햇살이와 설전을 벌인지 10분이 넘어가자 다른 아이들이 우렁찬 햇살이가 너무 시끄럽다고 투덜거리는 일도 생겨났다. 나는 이 햇살이만 봐주다가 다른 아이들을 못 보는 일은 더 이상 생기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렁찬 햇살이, 일어나요. 원장실 갈 거예요.”

“네?”

“우렁찬 햇살이는 지금 이 교실에서 글 쓸 준비가 안 되어있어요. 독서감상문은 원장실에서 마저 쓰고 오세요.” 


원장실 가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없다. 우리 학원 원장님께서는 포스가 대단하신 분이라, 아이가 독서 감상문을 빽빽하게 다 채우기 전까지는 집에 보내주지 않는 분이다. 우렁찬 햇살이가 순순히 원장실에 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햇살이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식이었다.


우렁찬 햇살이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자기를 원장실로 보낸다며 굉장히 억울해했다. 나는 우렁찬 햇살이의 수업 태도가 다른 친구들에게 어떤 피해를 줬는지 느끼게 해줘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햇살이들, 우렁찬 햇살이가 원장실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손 들어주세요. 선생님이 다수결에 따르겠어요.”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우렁찬 햇살이가 만약에 다른 친구들과 친했다면 아이들이 우렁찬 햇살이를 감쌀 수도 있었을 텐데. 우렁찬 햇살이가 평소에 다른 아이들의 일에 안 좋게 참견을 했다 보니 몇몇 아이들은 빨리 보내라며 성화였다. 


그런데 한 아이만 손을 들지 않았다. 홈런볼 햇살이는 망설이다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기회는 한 번은 더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결과는 가야 한다고 손을 든 쪽이 네 명, 손을 들지 않은 쪽이 한 명이었다. 다수결에 따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나는 우렁찬 햇살이를 원장실로 보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을 든 걸 보고 우렁찬 햇살이도 체념하여 원장실로 갔다. 


우렁찬 햇살이를 보내고 나서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밀려 있었던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나는 찜찜한 기분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홈런볼 햇살이가 손을 들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선생님 있잖아요~ 제가 계속 지켜보니까 우렁찬 햇살이는 선생님이 진짜로 원장실에 보낼 거라고 생각 못해서 더 까불었던 것 같아요.”

“그런가요?”

“선생님도 계속 ‘우렁찬 햇살이 이러면 원장실 보낼 거예요!’말만 하고 거의 안 보내셨잖아요. 오늘 처음 보내고.” 


홈런볼 햇살이 말이 맞았다. 나는 사실 마음이 약해서 주의만 계속해서 줄 뿐 햇살이들을 정말로 원장실로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 우렁찬 햇살이도 나에게 주의는 자주 받았지만 원장실에 가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홈런볼 햇살이가 말했다. 


“선생님이 계속 봐주시지 마시고 원장실 보낼 때도 있어야 우렁찬 햇살이도 선생님 말을 잘 들을 것 같아요.” 

나는 홈런볼 햇살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우리 아이들이 다 같이 토의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학급 회의 시간도 아니고, 일대일로 책 읽고 글쓰기에 충실해야 하는 논술학원이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좋아요. 그러면 우리 우렁찬 햇살이를 위해서 같이 규칙을 만들어볼까요?” 


내 말에 각자 책을 보던 아이들의 눈이 순식간에 나에게로 몰렸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이 하나같이 다 초롱초롱했다. 


“선생님에게 경고를 몇 번 받으면 원장실로 보내는 걸로 할까요?”

“세 번?”

“아냐 세 번은 너무 많아.”

“세 번을 경고받을 때까지 두면 우렁찬 햇살이는 계속해서 시끄러울 거야.”

“그럼 두 번?”

“그래, 두 번이 좋겠어.” 


아이들의 논의가 끝난 걸 본 나는 칠판에 ‘선생님에게 경고를 두 번 받으면 원장실 가기’를 썼다. 똘똘이가 손을 들고 추가 건의사항을 냈다. 


“‘원장실 가기’만 하면 별로 신경 안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칭찬 스티커 한 장 떼기도 추가하면 좋겠어요.”

 

오 이건 조금 센 걸, 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학원은 칭찬 스티커를 모으면 상품권을 주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저학년 고학년이고 상관없이 모두 칭찬 스티커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이 규칙이 추가되어도 괜찮겠어요?” 


아이들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모두 동의를 해주었다. 그것 외에도 ‘우렁찬 햇살이는 목소리도 크고 몸짓도 크니, 앞자리보다는 뒷자리에 앉히는 게 좋겠다’라는 의견도 나왔다. 선생님에게 경고를 받는 행동은 ‘큰소리로 떠들기, 허락 없이 돌아다니기, 딴짓하기’가 아이들의 의견으로 정해졌다. 


아이들은 자신이 의견을 내고 싶으면 손을 들었다. 같이 할 말이 있는 친구도 손을 먼저 든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손을 든 친구가 말을 할 때는 모두 경청했다. 그렇게 해서 규칙이 거의 다 정해졌을 때 시사박사 햇살이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이 규칙은 우렁찬 햇살이만 지키는 걸로 해요. 저희들은 빼고요.” 


원래는 규칙이 없던 교실이었는데, 막상 규칙이 생겨 칠판에 적힌 걸 보니 부담이 되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규칙은 우리 모두가 같이 만든 규칙이에요. 다른 친구들은 규칙을 안 지키면서, 우렁찬 햇살이한테만 이 규칙을 따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우렁찬 햇살이를 위해서 우리도 이 규칙을 잘 따라보는 걸로 해요. 알겠죠?” 


시사박사 햇살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자 우렁찬 햇살이가 원장실에서 돌아왔다. 나는 우렁찬 햇살이에게 칠판에 적힌 규칙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 모두가 우렁찬 햇살이가 더는 원장실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같이 의논해서 규칙을 만들었다고. 우리 햇살이들도 이 규칙을 지킬테니, 다음 수업 때 우렁찬 햇살이도 이 규칙을 지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렁찬 햇살이는 내 설명에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다음 주 수업 날, 나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만든 규칙들을 읊어주었다. 아이들에게 규칙을 환기해주고 수업을 시작하니 모든 아이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잘 참여해주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잡혔다. 원래 목소리가 컸던 우렁찬 햇살이도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작게 했다. 목소리를 작게 해야 하니 우렁찬 햇살이가 다른 아이들의 트집을 잡지도 않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주었다. 아이들도 우렁찬 햇살이가 얌전해지자 내심 놀란 눈치였다. 


그날 나는 수업을 5분 정도 일찍 끝낸 뒤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수업에서 MVP가 있어요 누구일까요?” 


그러자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우렁찬 햇살이요!”

“우렁찬 햇살이 오늘 정말 조용했어요.”

“우렁찬 햇살이가 수업 진짜 잘했어요!” 


나는 웃으면서 우렁찬 햇살이에게 칭찬 스티커를 두 개 주었다. 아이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시사박사 햇살이와 홈런볼 햇살이는 뒤를 돌아 우렁찬 햇살이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평소에 우렁찬 햇살이를 못마땅해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쉽게 마음을 여는 걸 보고 내심 놀랐다. 우렁찬 햇살이는 쑥스러웠는지 스티커를 받고 바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 뒤 남은 아이들에게도 스티커를 한 개씩 주었다. 


“우리 햇살이들도 모두가 만든 규칙을 함께 잘 지켜주었어요.” 


스티커를 받은 햇살이들의 표정이 기쁨으로 빛났다. 


그 이후 어떤 햇살이는 개인 사정으로 반을 옮기기도 하고, 어떤 햇살이는 시간표가 바뀌어서 다른 시간으로 가기도 하면서 오후 3시 30분 반 조합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날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규칙은 여전히 내 반 칠판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 규칙은 내가 맡은 교실에 들어오는 모든 아이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되었다. 3시 30분 반 조합은 흩어졌지만, 전에 3시 30분 반이었던 햇살이들은 그 순간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 같다. 시사박사 햇살이는 내 수업에 들어와서 칠판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해준다. 


“선생님 저 규칙 우리가 의견 내서 만들었잖아요, 그쵸.”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은 자부심으로 빛난다. 그 아이의 눈을 보면 나도 그때의 순간이 되감아진다. 한 아이를 위해서 머리를 맞대어 같이 규칙을 만들고, 만드는 과정에서 누군가 의견을 내면 모두가 경청하고, 패널티를 받는 규칙을 함께 지키기로 감수했던 것, 그렇게 함께 규칙을 지켜서 서로를 칭찬으로 격려했던 일을. 


‘이런 순간이 있어서 해피레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초보 선생님인 내가 아이들에게 더 많이 배울 때가 있다는 것을. 그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싶어서, 그리고 내가 배운 것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서 해피레터 작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후 3시 30분 반 조합은 흩어졌지만,

앞으로도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잊히지 않는 조합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Q. 

다른 이와 함께 성장했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해윤의 해피레터> 시즌 2 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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